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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보고
정미의병 발원지 터 정미의병, 구국 항일투쟁의 새 도화선
시위보병연대 장교들 (사진 : 독립기념관 제공)

1907년 대한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 같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뒤, 정미7조약까지 강제 체결하였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법령제정권과 관리임명권, 행정권 등 대다수의 국권을 일본 통감에 넘기는 것이었다.

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이 강제 체결된 후, 후속 조치로 대한제국 군대해산 명령이 내려졌다. 8월 1일 오전 7시, 군부대신 이병무가 시위대 여단장 양성환 참장 이하 연대장과 대대장 등을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관저로 소집하여 해산 계획을 발표하였다. 오전 10시 훈련원에서 해산식을 거행하겠다는 명령까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당시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한 끝에 권총을 꺼내 자결했다. 그의 품에서 나온 유서에는 당시의 비분강개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박승환 대대장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
(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

오전 8시, 박승환 대대장의 자결 소식을 들은 대원들은 무기고를 부수고 탄약과 무기를 탈취해 저항에 나섰다. 곧 인근의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까지 동참하여 총 700여 명의 한국군이 서소문과 숭례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탄약과 무기는 물론 수적으로도 열세였던 저항군은 약 2시간여 의 전투 끝에 다수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남긴 채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정미의병 발원 터 표지석

비록 이날 전투에서는 승리하지 못했지만, 이후 해산당한 군인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의병에 참여, 항일 무장투쟁의 병력과 전술을 크게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죽더라도 나라를 위해 한 번 싸워보겠다고 외치던 그들에게 진정 조국(祖國)이란 어떤 의미였던 것일까. 지금도 남대문 앞 서울상공회의소 뒤편에는 이날의 전투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

자료 참고 : 국가보훈처 - 이달의 독립운동가 박승환
http://www.mpva.go.kr/narasarang/month_hero_view.asp?id=70&ipp=12&sType=name&sText=%uBC15%uC2B9%uD658
문화콘텐츠닷컴 - 정미의병 발원 터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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