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브라운슈바이그는 하노버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교회들과 시청사 등 중세에 건조된 아름다운 건물들을 가진 아담한 도시이다. 이곳엔'게오르그-에커트 국제 교과서연구소'가 있어 필자가 해마다 연구프로젝트 작업을 위해서나 학술회의를 위해 자주 찾는 곳이다. 이 연구소와 동북아역사재단은 2년 전 MOU도 체결되어 활발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지난 5월4~5일 이틀간 이곳에서는 특별한 국제 학술회의가 열렸다. 1983년부터 26년간 이곳에서 연구원으로 일했고 지난 16년간은 부소장으로서 학문과 정치교육적 활동을 연결하고, 세계의 주요 역사분쟁 지역의 화해를 위한 사업을 기획하고 중재해 온 실천가이자 이론가인 팔크 핑엘 박사의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그는 1944년 폴란드의 단찌히(그단스크)에서 태어난 다음 해인 1945년에 가족과 함께 함부르그로 피난·이주하였다. 이후 함부르그와 괴팅엔 그리고 하이델베르그에서 철학과 고대 그리스어 그리고 역사를 전공했다. 개념사와 역사이론 연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스승인 라인하르트 코젤렉과의 만남, 그리고 68운동 세대로서 나치시대의 범죄에 대한 부모세대의 침묵을 깨뜨리려는 철저한 문제의식은 역사가로서 그의 삶을 깊이 각인하였다.
팔크 핑엘 박사가 1983년'게오르그-에커트연구소'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연구소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그는 68세대로서 과거의 역사적 범죄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요구하는 진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학문과 정치교육적 행동 간의 간극을 항상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탁월한 균형감각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바로'게오르그-에커트연구소'의 연구원이 꼭 갖춰야할 덕목이었다. 그는 연구소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착수하고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번 학술회의는 그가 주도하거나 중요한 기여를 한 분쟁지역 프로젝트들의 성과를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역사화해 실천가이자 이론가, 팔크 핑엘교수
전체 학술회의의 제목은 "경쟁하는 역사해석들: 교과서와 커리큘럼을 둘러싼 논란들"이었다.
5월4일 오전의 제1회의에서는 적나라한 갈등상황에서 교과서 대화의 희망과 좌절 경험들에 대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온 역사가들이 보고했다. 오후의 제2회의에선 동남부유럽의 역사 갈등 중재에서 외국 전문가들의 개입의 성과와 어려움에 관해 논의했다. 핑엘 박사는 유럽안보협력조직(OSZE)의 보스니아와헤르체고비나 사절단의 교육담당 소장으로 사라예보에 파견되어 평화를 위한 교육을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제3회의에선 "어떤 역사해석이 관철되는가? 몰도바, 남아프리카, 동아시아에서의 교과서대화의 성과와 실패"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동아시아에서는 필자 혼자 초청을 받았으며 동아시아 역사교과서 대화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발제했다.
첫날 저녁에는 연구소장인 지모네 래씨히 교수에 이어 핑엘 박사의 논문들을 모아 출간한 책을 전달하였다. 이어서 그보다 1년 먼저 연구소에 들어와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동료인 한나 쉬쓸러 교수가 주인공인 팔크 핑엘의 일생을 소개하며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연설을 했다. (이 글은 쉬쓸러 교수의 연설문 원고에서 얻은 많은 정보들에 의존하고 있다.) 다음 날 오전에는 오리엔트에 대한 서양의 관점의 변화를 역사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규명한 발제와 토론이 있었다. 오후에는 나치즘에 대한 역사교육 문제를 다룬 발제와 토론이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야 뒤늦게 시작한 오스트리아의 나치즘 관련 역사교육 프로젝트에 대한 소개가 있었고, 나치 강제수용소 견학을 통한 현장학습의 의미에 대한 발표도 있었다.
이틀간에 걸쳐서 다루어진 테마들은 모두 핑엘 박사가 4반세기 동안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각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추진했던 사업들 이었다.
지적 자극을 준 노학자에게 보내는 사랑과 존경
핑엘 박사는 이태리의 아그넬리재단이 후원한 "교과서 속의 유럽"이라는 프로젝트를 이끌었으며, Council of Europe의 문화협력위원회(Council for Cultural Co-operation)가 후원한 중요한 보고서인 "The European Home: Representations of 20th Century Europe in History Textbooks"(2000)를 집필하였다. 그는 국제교과서연구 방법론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국제 교과서연구를 위한 유네스코 핸드북"의 저자로서 최근에 이 책의 수정판을 출간하였다. 동아시아와의 인연도 각별하여 한국과 일본의 학술회의에 여러 차례 다녀갔고, 중국의 상하이에서는 몇 차례 객원교수로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2006년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통일과 역사교육"을 주제로 한독공동 학술회의를 에커트연구소에서 개최했는데 그 아이디어를 낸 것도 핑엘 박사였다.
둘째 날은 또한 팔크 핑엘 박사의 생일이기도 했다. 저녁 7시 30분에 시작한 송별 파티는 핑엘 박사가 연구소의 동료들로부터 얼마나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물이었는지를 실감나게 해준 흥미로운 체험이었다. 연구소의 동유럽 전문가인 로버트 마이어 박사는 독일의 방송국인 ZDF의 9시 뉴스를 패러디 해서 다양한 역사적 캐리커처에 핑엘박사의 사진을 오려 넣어 위트가 넘치는 뉴스를 방영한 후 그것을 담은 CD를 선물했고, 지리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게오르그스퇴버 박사는 신문의 잘 알려진 만평들을 패러디 해 핑엘박사의 활동영역이 얼마나 컸는가를 재치 넘치게 편집하여 보여주었다.
또한 핑엘 박사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노랫말로 만들어 재미있는 노래 곡조에 맞춰 합창을 하기도 하였다. 흥겨운 디스코 댄스까지 온갖 정성과 지혜를 모아 재미있는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는 동료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