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드라마를 볼 때면 항상 감탄을 한다. 이야기를 엮어가는 솜씨가 놀랍다. 소재의 다양성도 그렇고. 10회 혹은 11회 분량이 하나의 완결성을 가지면서 각 회 마다 밀도 있게 사건들을 배치함으로써 어느 하나 허튼 장면 없이 짜여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인기 스타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97년작'기프트'도 그랬다. 물론 결론이 그동안의 극적 긴장에 비해 좀 풀린 듯 한 느낌이 있고, 마지막에 너무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알려주고는 허겁지겁 종지부를 찍은 느낌도 있다. 그럼에도 기억을 잃어버린 주인공 유키오가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던지는 질문, 배달 일을 하면서 만나는 고객들이 건네는 메시지는 한갓 속된 드라마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꽤 심도 있고 나름 심오하기까지 하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 드라마가 곧잘 정색하고 교훈을 주려해서 싫다고 하지만, 오히려 나는 그래서 더좋다. 적어도 내가 본 일본 드라마들은 매우 대중적인 방식을 택하면서도 품위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는다. 작품성과 대중성의 행복한 조합을 능숙하게 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일본 드라마를 통해서 일본의 대중문화가 그들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을 어떻게 표현하고 담으려고 하는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지에 대한 암시를 읽는 재미가 있다. 물론 순전히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고, 꿈보다 해몽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드라마이든 영화든 혹은 그림이든 거기에서 무엇을 읽고 느끼느냐는 보는 이의 자유가 아니던가?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유키오는 어느 날부터인가 점점 또렷해지는 과거에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자신의 과거로부터 도망 다니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과거는 지금과는 너무 달랐다. 옛 모습이 뚜렷해질수록 과거의 자신으로 인해 오늘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견딜 수 없이 무섭고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과거를 거슬러 오르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과거를 만나는 불편과 수고를 감내하지 않으면 진실은 찾을 수 없다. 불편한 진실 찾기, 그것이 기억상실로 지낸 지난 3년이 유키오에게 준 가장 값진 선물인 것이다.
과거 일본은 제국주의를'근대'와 일치시키고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 상처를 주었다. 이제 일본은 그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를 위해 일본은 이웃 나라 사람들에게 자기가 한 짓을 잊어달라고 한다. 기억을 지우라고, 지우자고, 같이 잊자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 잘 지내자고 한다.
하지만, 그러려면 일본은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으로부터 도망 다녀서는 안 된다. 머리가 빠개질듯 아프고 눈앞이 침침해지고 다리가 휘청거리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잃어버린 기억에서 건져 올리지 않으면, 과거를 똑바로 응시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키오처럼.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이 이웃에게 전하고 싶은'진심'을 스스로 영원히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남들도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도리와 세상의 이치는 따로따로가 아니다. 유키오가 마음의 병을 고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과 일본이 과거를 털고 이웃과 잘 지내는 일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드라마를 봤다. 그래서 더욱 흥미진진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본도 선물을 받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선물을 배달해 주면 좋겠다. 유키오처럼.
※ 역사에세이는 재단 연구위원들이 쓰는 자유로운 형식과 내용의 칼럼입니다. _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