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병합 100년 재조명 하와이 국제학술회의
동북아역사재단과 하와이대학교가"한일병합의 성격과 정책(Personality and Politics in Japan's Annexation of Korea)"을 주제로 공동 주최한 국제학술회의가 4월23, 24일 이틀간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에서 열렸다. 이번 회의에서는 한국 5명, 일본 2명, 미국 1명 등 총 8명의 주제 발표와 심도 있는 토론이 이루어졌다. 또한 최영호, 강희웅, 반 다이크 등 하와이대 교수들, UCLA 등에서 온 한국 유학생, 아시아의 평화문제에 관심이 많은 학생 및 교직원 등이 참석하였다.
첫날 제1세션에서의 첫 발표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최덕규 박사였다." 간도문제와 일본의 한국병합(1905-1910)"이라는 주제로 러시아 자료를 중심으로 러일전쟁 전후의 과정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러일조약을 체결하지 말 것을 러시아 황제에게 요청한 고종의 친서는, 러시아의 도움으로 한일병합을 저지하겠다는 고종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다음으로는 필자의 순서였다." 대한제국 황실의 독립의지 재론"이라는 주제로,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고종의 제2차 파리평화회의 밀사 파견이 이루어지는 배경과 실천과정, 이 계획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실패 후 상해로 이동하여 임시정부 설립의 구심점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끝으로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고종황제의 독살과 일본정부 수뇌부"라는 주제로, 최근 알려진 일본 교토대학 나가이 가즈(永井和) 교수의 홈페이지에 실린"쿠라도미 유사부로(倉富勇三郞)의 일기"중의 자료를 중심으로 고종 독살의 진위를 분석하였다.
제1세션에 대한 토론에서 아라이 교수는"일본어에'풍설'이라는 단어는'소문'이라는 말로 애매한 의미를 띠고는 있으나, 당시의 역사적 환경을 생각하면 그 소문이 의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정의를 내렸다.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방법으로써'수법'과'동기'가 있는데, '동기'라는 것은'수법'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고종의 외교 활동에 대한 재평가
동북아역사재단의 도시환 박사는"러일전쟁 패전 후 러시아가 실질적 역할을 하며 강대국들과의 야합을 통해 한국병합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논리 전개의 위험성에 재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이상찬 교수는"한일병합을 국제정세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으나, 만주와 간도에 대한 열강의 입장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에 최박사는"안중근 의거로 러·일 관계가 약화되면서 이를 틈타 미국의 입장이 강화되자 일본이 미국에 대응하기 위해 러시아와 타협하게 됨으로써 일정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답했다.
오후 제2세션에서 아라이 신이치 교수는," 한국주차군과 조약강제에 대하여-군율문제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발표하였다. 강화조약 단계에서 한국주차군이 어떻게 무조약 상태에 대처하였는가를 군관계 자료를 통해 검토한 것이었다. 전 메이지대 운노 교수가"하세가와 사령관이 일본 군대를 궁중에 들여보낸 것을 군율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한 것에 대해 비판한 내용이었다.
다음으로 하와이대 강희웅 교수의"제국 육군의 수뇌부와 한국"이라는 주제발표가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알려면 일본군대 내 파벌의 주도세력과 그 생성과정을 분석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고종에 대한 독살 지시도 데라우치나 하세가와 등 개인에 대한 추궁보다는 메이지유신의 주축이던 야마가다 아리토모 등이 장악하고 있던 추밀원에 대한 연구가 중요함을 강조했다.
제2세션에 대한 토론에서, 이태진 교수는"보호조약 체결 시의 군대 동원도 군율로 합리화시켜 온 논리를 부정할 수 있는 중요한 이론 틀"이라고 평했다. 강희웅 교수는 코메이(孝明)천황 독살과 고종 독살의 배경이 흡사하므로 이에 대한 비교연구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사사가와 교수는 군비확장이 야당의 반대로 어렵게 되자'주권선'과'이익선'이라는 이론이 등장하게 된 것이므로 정한론에 대해 분석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막부 말까지 한·일 우호 외면하는 日학계 비판도
이튿날 이어진 제3세션에서의 첫 발표자는 메이지대학의 사사가와 교수였다. 그의 논제는"소위 정한론과 중국과 서구의 국제법체계"였다. 그는 한국병합과 문명국을 엮어서 연구하는 일본의 국제법 학자가 없고, 일본 사학자들은 의식 없는 연구를 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즉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이행될 때 고대와 새로운 시대가 단절된다는 기계적인 도식적 사고를 갖고 연구함으로써, 막부말까지 조선정부와 매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열강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하려 했던 사실을 도외시하고 정한론만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비평했다.
다음으로 서울대 이상찬 교수는 규장각 자료를 근거로 하여"한국 황제는 통치권 양여 조약안을 재가하였는가"라는 주제를 발표하였다. 그는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는 각종 조약 문안을 비교하여, 한일조약 체결 시 일본 측이 일방적으로 조약문을 작성했음을 밝혀, 모든 조약이 무효라고 결론 내렸다. 이어"독일과 한일합병 1895-1915"이라는 주제로 명지대 정상수 박사의 발표가 있었다. 그는 고종이 냉철한 현실정치가였으며, 한국병합이 구미열강의 동의를 받았다고 하는 일본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독일을 중심으로 미국과 프랑스는 한일병합을 반대했음을 고찰하였다.
제3세션의 토론에서, 반다이크 교수는 구미열강과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조약이 한·일 양국 간의 조약보다 형식적인 틀을 잘 갖추고 있었지만, 국제법상 불법임이 판명된 만큼 이들 제 조약과 비교해서 연구하는 방법도 중요함을 제안하였다.
제4세션 종합토론은 향후 방향을 모색해 보는 시간이었다. "한일병합과 관련한 연구의 마무리가 아닌 새로운 시작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이태진 교수의 코멘트에 이어 많은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일본 측 학자들은 이번 회의에서 한일병합에 대한 새로운 분야의 연구가능성과 젊은 학자들의 발굴이 중요함을 주장했고, 한국학자들은 향후 국제학술회의의 개최를 통한 공동연구 및 2010년 한일병합 100년을 기해 강제병합과 관련한 조약문 등의 자료의 편집 간행의 필요성 등을 제안하였다.
마지막으로 동북아역사재단이 6월 22일"한일병합의 효력에 관한 국제법적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개최하는 국제학술회의를 준비하고 있는 도시환 박사의 코멘트를 끝으로 이번 학술회의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