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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한일병합 100년'을 일본의 역사인식전환의 계기로
한일병합 100년을 일본의 역사인식 전환의 계기로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

2010년은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주지하듯이 일본은 1945년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 지배에 대하여 근본적인 반성을 하지 않아 이른바 "역사분쟁"의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일본은 100년이라는 시간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다음 100년을 맞이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역사분쟁의 해결을 위하여 획기적으로 변모할 것인지의 귀로에 서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병합 100년' 을 계기로 삼아 일본이 근본적인 반성을 하고 새로운 한일관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향할 것을 호소하고자 이와나미 서점이 발행하는 잡지 『사상(思想)』의 2010년 1월호(발매는 올해 12월)에 특집호를 기획하고 있다. 일본의 연구자를 중심으로 수십 명의 연구자가 일본의 역사인식과 '병합', 근대한일관계와 일본의 지배, 전후 일본의 한국인식 등을 주제로 논문을 집필하게 되며 나아가 내년 8월에는 이 특집호와 관련하여 심포지엄도 개최할 예정이다. 한국의 연구자들 또한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을 주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특집호에 집필하고자 하는 문제의 일부를 논하고 토론의 논제로 삼고자 한다.

'한국병합'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일본사 전체의 인식과 깊이 결부된 문제다. 단순히 일본의 근현대사 문제가 아닌 일본사전체에 대한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병합'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기 위해서는 일본사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일례를 들어보자. '병합'으로부터 약 두 달이 경과한 1910년 11월 3일자 『조선호(朝鮮號)』라는 잡지가 『역사지리(歷史地理)』의 임시 증간호로 발간되었다. 『역사지리』는 1899년에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일본역사지리연구회(훗날 '일본역사지리학회')의 기관신문으로 '병합'을 기념하여 임시증간호를 발간한 것이다. 발간사를 보면'병합'이 일본사 2600년의 정화(精華)이며, "천년의 꿈을 이룬 이 쾌거를 기념하여 독자와 함께 국운의 융성을 노래하기 위하여" 발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침략 인정 뺀 '연구성과' 평가는 정당한가

여기에는 총 22명이 글을 기고하였는데 그 중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연구가도 이름을 올렸다. 호시노 히사시(星野恒), 쓰보이 구메조(坪井九馬三),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세키노 타다시(關野井), 요시다 토고(吉田東伍), 기타 사다키치, 나카 미치요(邦珂通世), 구로이타 가쓰미( 板勝美), 미우라 히로유키(三浦周􆪧), 오카베 세이이치(岡部精一, 이 잡지의 당시 편집자), 다나카 요시나리(田中義成), 이마니시 류(今西龍), 쓰지 젠노스케( 善之助) 등 13명이며, 발행자에 따르면 질병 등을 이유로 기고하지 못한 시게노 야스쓰구(重野安繹), 미카미 산지(三上次),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 등 3명을 제외하면 당시의 내로라하는 역사연구가를 총망라한 집필진이었다. 즉 일본 역사학계 모두가 '병합'을 축하한 것인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당시 그들의 주장이 아닌 여기에 이름이 등장하는 연구자들이 전후 역사학계에서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2003년에 발간된 나가하라 케이지(永原慶二)의 『20세기 일본 역사학』(吉川弘文館)이라는 책이 있다.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20세기 일본의 역사학에 관한 사학사이며 저자인 나가하라는 전후 일본의 대표적인 중세사연구가다. 이 책에는 많은 역사연구가가 거론되는데, 『조선호』에 이름을 올린 13명 가운데 오카베 세이이치와 이마니시류를 제외한 11명이 등장하며 게다가 이들 11명의 연구가 모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가령 '일선동조론(日鮮同祖􆧥)'을 주장하며 '병합'이 고대 한·일 관계로의 복귀하는 것이라하여 일본의 지배를 찬미한 기타 사다키치에 대해 이 책에서는 '일선동조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으며 피차별부락에 처음으로 주목한 연구자로서 기타 사다키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기타 사다키치에 앞서 처음으로 '일선동조론'적인 견해를 제기한 호시노 히사시나 그와 함께 최초의 도쿄 대국사과 교수를 지낸 구메 구니타케, 도쿄대 자료편찬소 초대 소장을 지낸 쓰지 젠노스케 등은 실증주의 사학자로서 황국사관적인 입장을 비판한 측면만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나가하라의 이해는 일본사 연구자라는 측면에서 개개인을 평가한 것이며 '병합'에 대한 태도라든지 그 근저에 있는 한국사에 대한 이해 문제 등을 완전히 도외시하였다. 물론 필자는 '병합'을 축하하는 글을 썼다고 하여 그들의 연구에 의미가 없음을 주장할 심산은 없다. 그러나 주로 그들의 일본사에 관한 연구와 한국사 이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인정하는 그들의 입장을 완전히 분리하여 전자의 측면만을 높이 평가하는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나가하라식 일본사연구자 평가를 비판하며

나가하라의 견해는 물론 개인적인 것이나 현재 일본의 역사연구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또한 일본의 역사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연구가들의 한국사에 대한 인식에도 중대한 결함이 있다. 일례로 필자는 예전에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의 한국사 이해와 탈아적 경향을 비판한 바 있는데(미야지마 히로시 「평화의 시각에서 다시 보는 일본의 '근세화': 일본의 근 탈아적 역사인식 비판」 『창작과 비평』 136호, 2007여름), 이러한 문제는 다른 연구자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국민국가론'의 입장에서 일본의 근현대사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니시카와 나가오(西川長夫) 또한 마찬가지이다.

'국민국가론'은 서구에서 기원하는 근대라는 시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며 포스트 모던과 그 근본을 같이하는 것으로 근대의 억압성을 비판하는 문제의식에는 공감하나 지극히도 제국주의 중심으로 역사를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을 일본의 한국지배에 적용하면 한국은 부득이 객체화되어 그 민족운동까지 일본의 윤리의 속박을 당하는 측면만이 부각되게 된다. 나아가 한국에 대한 지배와 일본국내의 아이누 오키나와에 대한 지배(이른바 국내 식민지)를 동일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이해는 필자의 사견으로는 조선시대에 확립된 문명주의에 대한 몰이해의 산물이며, 따라서 '병합'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을 단편화시켜버리는 견해를 낳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가하라는 상기 저서의 결론부분에 일본의 사학사를 총괄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명치 유신 이래 우리의 선배 역사가들은 거시적으로 보면 민감하게 시대의 동향이나 과제에 임하기 위하여 성실한 노력을 거듭해왔다. 일본의 역사학 연구는 일관적으로 '현재' 에서 '과거' 를 바라보고, 지금 현재 필요한 과거를 심층적인 실증과 이론으로부터 발견해 온 것이다. 이야말로 '비판학(學)'으로서 역사학의 책임에 부합하는 방향이었다."(315~316쪽)

필자는 이러한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으나 이러한 인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병합 100년'이 일본의 역사인식에 던지는 문제를 조명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