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고 있는 사람보다는 낯선 이와 사랑에 빠지기 쉬운 것 같다. 아마도 가까운 사람과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의 감정이 닳고 헐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웃나라인 일본과 우리의 관계 역시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싶다. 한·일간의 선린관계가 금이 가고 불신의 골이 깊어진 근본원인은 일본의 한국강점이다. 그렇다면 한국근현대사에 아픈 기억과 깊은 상처를 준 일본을 옛 성인의 말씀대로 사랑으로 다시 보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는 한일병합과정에 대한 학술적 재검토로부터 시작하여 일본의 사과와 반성으로 마무리되어야 할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이 교린관계에 있던 이웃국가인 한국을 병합하기 위해서는 아시아국가가 아니라는 철저한 자기부정 논리와 미국을 포함한 제국주의 열강이 한일병합을 열렬하게 지지했다는 상황논리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공포된 한일병합조약에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코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체결한다고 천명함으로써 한국강점을 합리화했다.
세계는 일본의 한국강점을 지지했는가?
그렇다면 일본이 미국을 기습 공격하여 발발한 태평양전쟁의 결과 한국이 광복을 되찾고 동양의 평화가 확보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과연 미국은 '탈아입구론(脫亞入歐)'을 주창한 일본을 구미열강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한국강점을 지지했는가? 미국이 일본의 한국강점을 지지했다는 학설은(심지어 국내에는 일본학자 나카타 아키후미(長田彰文)의 『미국, 한국을 버리다』 가번역, 출판되어 있다) 병합의 책임을 외부로 돌리려는 속셈을 반영한 것은 아닐까?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은 동북아시아에서는 인접국을 강박할 수 있는 국가였을지 몰라도 세계적 차원에서 일본의 위상은 동아시아의 신흥국가에 불과했다. 일본의 대륙침략을 견제하기 위해 청일전쟁 직후 성립된 '3국간섭(1895)', 러·일전쟁 이후 독일·미국·중국간의 '제2차 3국간섭(1908) 시도' 등 제국주의 열강은 지속적으로 일본의 팽창을 견제해왔다. 특히 1909년 3월 수립된 미국 태프트 행정부의 동아시아정책이 '문호개방' 과'중국의 영토보전'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과 남만주를 러일전쟁의 전리품으로 간주하던 일본의 대륙침략정책과 정면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열강의 충고에 따라 한국과 남만주를 독점하려는 계획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과 대립하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한국을 병합하고 남만주에 독점체제를 구축할 것인가? 불행하게도 일본은 후자의 길을 선택했고 이는 일본으로 하여금 세력균형의 대책을 마련하기 보다는 대미전쟁의 길로 나아가도록 만들고 말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의 선각자 단재 신채호의 대한매일신보 사설 「만주와 일본」(1910.1.12)은 한일병합문제의 본질과 관련해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 ...청국과 일본간 협약이 된 소문이 낭자하니 더 사나운 호랑이의 태도를 가지고 사방을 엿보는 구미 열강국이 어찌 이 시대에 이익이 모인 중국내륙에 제일 긴요한 땅이 되는 만주천지에서 아라사와 일본 두 나라만 마음대로 뛰놀게 맡겨두며, 또 어찌 동방 한 모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섬나라 일본의 활개 짓을 앉아서 보리오... (중략)일본인이여 세계는 세계인의 세계라 일본의 독주를 허가하지 않으니 진정한 동양평화의 대책을 잡고 일본의 입지를 공고히 하며 동양의 행복을 유지함이 어찌 상책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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