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적으로 조공은 제후국이 천자국에 보내는 예물이니, 뭔가 정성과 공경이 담긴 절차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만약 엄청난 재물을 주고 꼬드겨서 조공을 바치게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면, 조공-책봉도 이름과 실제가 다르고, 그것을 통해 구현되는 질서 체계도 재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서기 1년, 전한의 마지막 황제 평제가 아홉 살에 즉위했다. 이 때 황태후의 후원 아래 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왕망(王莽)은 찬탈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 작업의 일환으로 "월상씨(越裳氏)가 주공(周公)의 덕을 흠모하여 거듭 통역[重譯]을 대리고 와서 흰 꿩을 바쳤다"는 고사를 재현했다.
앞서 왕망은 익주(益州)의 관리들에게 은근히 뜻을 전하여 변경 밖의 이민족들로 하여금 흰 꿩을 바치게 하고, 이를 황태후에게 아뢰어 종묘에 올리게 하였다. 이에 뭇 신하들은 "왕망의 공과 덕은 주공이 성왕(成王)을 보좌하여 흰 꿩의 상서로움이 있게 된 것과 같아, 천년 만에 같은 징험이 나타난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서주(西周) 시대의 주공과 같은 칭호를 내려줄 것을 청했다. 이로써 왕망은 한나라를 편안하게 했다는 뜻의 안한공(安漢公)이 되었다. 왕망이 재현했던 고사는 전한 초기에 편찬된 《상서대전》(尙書大傳)(권3)에 실려 있다.
성왕 때, 다른 줄기가 합쳐 하나의 이삭을 팼는데 그 크기는 수레 높이에 이르고 부피는 상자를 채울 만했다. 어떤 사람이 이를 바치자 왕이 주공을 불러 이에 대해 물었다. 주공이 말하기를 "세 줄기가 하나의 이삭을 팬 것은 천하가 화합하여 하나 같이 됨을 가리킵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월상씨가 거듭 통역을 대리고 찾아왔다.
이민족의 자발적 복속을 가장하여 정권을 찬탈한 왕망
교지의 남쪽에 월상국이 있다. 주공이 섭정하고 6년 동안 예악을 정비하니 월상씨가 세 마리의 코끼리를 타고 거듭 통역을 대리고 찾아와서 흰 꿩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길이 멀고 산천이 험하여 말이 통하지 않는 까닭에 거듭 통역을 대리고 와서 조공을 합니다"라고 하였다. 주공이 조공을 받을 수 없다고 하자, "저희가 (사신으로 가라는) 명을 받자 저의 나라의 원로께서 말하기를 '오래만이구나! 하늘이 폭풍과 장마를 내리지 않은지가. 그것은 중국에서 성인이 나왔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어찌 찾아가서 뵙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주공이 그들을 왕에게 보내니 그들의 선물을 종묘에 올렸다.
이 고사는 《한시외전》(韓詩外傳)(권5)에도 기재되어 있는데, 줄거리는 거의 유사하지만 '중역'이 아홉 번 통역이란 뜻의 '중구역(重九譯)'으로 되어 있는 등 다른 점이 있다.
이 고사는 1차 사료인 《사기》나 《상서》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고, 상황 설정도 비약이 심하여 실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전국시대 어느 시점에서 주공을 가탁하여 설정된 이상적인 대외관계의 모형이 한나라 초기에 기록으로 정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침 당시 국가사회적인 현안은 흉노 제압이었는데, 이를 위한 비용이 매우 컸으므로 치자의 덕에 따른 이민족의 자발적인 복속이라는 설정은 매우 매력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를 간파한 왕망은 자신이 이를 시현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정권찬탈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뒤 왕망의 찬탈 준비는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이 때 그는 다시 한 번 많은 재물로 조공을 사서 자신에 대한 지지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먼저 그는 풍속사자(풍속을 시찰하는 사자) 8인을 전국에 순행시킨 뒤 이들에게 각 지방에서 자신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지었다는 노랫말 3만언을 거짓으로 만들게 했다. 이어서 사신들을 변경 밖의 강족에게 보내 많은 금과 비단으로 회유하여 땅을 바쳐 한나라에 속하도록 했다. 그들은 돌아와 황태후에게 아뢰었다.
남제 북위의 책봉 제서를 거부한 고구려
그들에게 땅을 바친 까닭을 물었더니 "태황태후가 성명(聖明)하고, 안한공(왕망)이 지극히 어질어서 천하가 태평하고 오곡이 풍성하여 벼의 키가 한 장 남짓이나 되기도 하고, 혹은 좁쌀 하나에 알맹이가 세 개나 들기도 하고, 씨를 뿌리지 않아도 저절로 싹이 돋기도 하고, 감로가 하늘에서 내리고, 봉황이 내려와서 춤추며, 4년 전부터는 강족 가운데 병들어 고통 받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기꺼이 한나라에 속하려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같이 교묘한 술책을 통해서 3년 후 왕망은 마침내 전한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술책이 현실에서 마냥 통하기는 어려웠던지 10년 만에 대반란이 일어나 그 자신이 반란군에게 피살됨으로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왕망의 찬탈은 비극으로 끝났으나, 그의 수법은 뒤 시대에도 두고두고 찬탈을 꾀하는 자들이 따라서 배워 써먹는 고사가 되었다. 후한을 멸하고 위를 세운 조비(曹丕), 동진을 멸하고 송을 건국한 유유(劉裕), 송을 멸하고 제를 건국한 소도성(蕭道成) 같은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찬탈자들은 자신이 정권을 담당하고 나니 풍속이 다른 먼 나라에서도 그 덕을 흠모하여 '아홉 번 통역'하면서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면서 찬탈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어쩌면 그들은 왕망이 그랬던 것처럼 은밀하게 이민족 군주에게 많은 재물을 주고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도록 종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그들은 찬탈할 때 이민족 군주들에게 높은 관작을 수여하는 책봉 제서도 반포했는데, 그것은 피봉국의 의사와는 무관한 일방적인 선언이었다. 그 제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피봉국에 전달하거나 피봉국의 사신이 올 때 전달했을 것이나, 피봉국에서 그 제서를 접수했는지도 확실치 않다. 《남제서》(南齊書)에 따르면 고구려는 (남)제에 사신을 보냈으나 "강성하여 (남제·북위의) 책봉 제서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