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민족(거란, 탕구트, 여진, 몽골, 만주)과 그들이 세운 정복왕조(거란[요], 대하[서하], 금, 원, 청)는 종종 중원과 한반도 등 이웃 선진 문화 지역을 침략하고 파괴한 '오랑캐'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고 이들 북방민족들은 기마병으로 구성된 우월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원 북부는 물론 만주와 몽골을 포함한 내륙아시아에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결국에는 그들이 정복한 '선진' 문화에 동화 되어 정체성마저 상실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중국'에 흡수된 정복왕조와 북방민족은 '중국' 역대 왕조사의 한 단계로서, 그리고 '중화민족'을 구성하는 '소수민족'으로서만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를 단선적 발전의 틀로 접근하거나 문화적 동화 현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북방민족과 정복왕조 역사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 학계의 '현재주의적' '한족중심' 역사관의 극복을 위해서는 북방민족과 정복왕조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의 정립이 필요하다.
이 프로젝트는 그러한 노력의 첫 단계로 먼저 10~18세기 북방민족과 그들이 세운 정복왕조 역사에 대한 기본 사료와 주요 연구 현황을 시대와 지역(한국, 중국, 일본, 서구)별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북방민족 연구의 가장 풍부하고 중요한 사료들은 물론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한문사료의 한계와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북방민족 자신들, 그리고 전통 동아시아 이외 지역(아랍과 서구 등)의 언어와 문자로 기록된 사료와 그러한 비(非)한문사료를 활용한 연구 성과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를 들면 몽골제국을 단순히 중국의 원(元)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서구학계 그리고 이슬람사 또는 중동 중세사 학계의 몽골 제국사 연구 동향을 바탕으로 보다 거시적인 몽골 제국사 연구의 틀 속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북방민족과 정복왕조는 하찮은 '오랑캐'가 아니다
다민족 제국이었던 북방 정복왕조는 일원적 통치체제의 중원 한족왕조와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매우 달랐다. 최근 서구학계에서는 '중국사'에서 말하는 '한화'라는 이론으로는 북방민족이 세운 정복왕조의 성립과 발전 과정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적지 않은 만문(滿文) 사료가 남아있는 청대의 역사를 단순히 중국사의 한 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즉 중원지역)을 초월하는 거대한 만주제국의 시각에서 접근하는 연구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만주족 중심의 관점(a Manchu-centered view)에서 내륙아시아 지역과의 문화적 연결성, 제국 내부의 '민족적' 차별성, 그리고 한족 왕조와는 대비되는 대외관계 인식 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전의 거란, 탕구트, 여진, 그리고 몽골 시기에도 적용된다.
이 프로젝트는 외국학계의 연구 동향을 파악하고 반영하기 위해 외국의 저명 학자들을 자문학자로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신청사'(New Qing History)를 주도하는 서구학자 중 한명인 다트머스 대학(Dartmouth College)의 크로슬리(Pamela Crossley), 미국의 몽골제국사 연구자인 알슨(Thomas Allsen), 몽골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촐몽(S. Tsolmon), 조선시대 여진관계사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미국학자 로빈슨(Kenneth Robinson), 청대 몽골사 전공인 중국 남경대학의 테무르(特木勒), 그리고 내몽골대학의 에르데니바타르(额尔敦巴特尔) 교수 등이 자문학자로 참여하여 프로젝트 진행 전반에 대해 비판과 의견을 주고 또 자료수집 등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물론 북방민족과 정복왕조사 연구에서 고고학적 유물을 대부분 독점하며 이 분야를 주도하고 있는 중국학계의 연구시각과 동향, 그리고 성과에 꾸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중국학계 연구 시각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서구와 일본 학계의 연구동향과 성과를 파악하고 나아가 한국학계의 독창적인 시각을 모색해야 한다.
개별 국가사를 넘어 '동아시아사'로 가는 열쇠
한국의 전근대 역사 문헌 속에 산재해 있는 대량의 북방민족사 관련 기록들은 북방민족과 정복왕조와의 밀접한 역사적 연관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또 북방민족과 정복왕조의 알타이·퉁구스어계 언어로 기록된 기초자료의 특성은 한국학계가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정리를 토대로 북방민족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방향을 설정하여 전문 인력을 양성한다면 한국학계의 학문적 위상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국의 역사학계는 종종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를 구분하여 그 경계를 넘어서는 거시적 연구는 많지 않고 비록 경계를 넘었다 하더라도 한·중관계사 혹은 한·일관계사처럼 국가 대 국가의 '관계사'에 국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대에 민족국가를 세우지 못한 북방민족과 정복왕조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전락시켜 왜곡하거나 아예 잊히고 말았다. 단순한 중국사, 한국사, 일본사 등 국사의 조합을 초월하고 통합사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사'(나아가 세계사)의 서술을 위해서는 이러한 경계를 넘어 북방민족과 정복왕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포괄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현대 중국 민족주의 혹은 한족중심주의 역사학이 가지는 인식의 한계와 그 이념에 기원하여 등장한 동북공정과 같은 연구 성과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북방민족과 정복왕조의 역사는 우리 역사의 '주변'에 있었던 하찮은 '오랑캐'의 역사가 아니다. 이 프로젝트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비판적으로 정리하는데 머물렀지만 앞으로 한문사료에 얽매이지 않고 '중국사'의 틀을 초월하는 북방민족과 정복왕조 역사 연구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외국학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한국학계의 훌륭한 성과를 기대해 본다.
한편, 5월 23일 진행된 동 학술대회에 이어, 5월 24일 진행된 DILA 집행위원회(Governing Board) 회의에서는 DILA의 아시아 지부를 해성 국제윤리문제연구소에 설립하는 안에 대해 의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