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100년 전 식민지배와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가 남긴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 먼저라는 지적이 많다. 극복을 위한 방안으로는 공동 역사 연구와 함께 공동의 역사 교과서 개발이 꼽힌다. 하지만 당장 현행 교과서의 내용을 둘러싸고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유럽과 같은 공동 역사 교과서가 가능한 일일까?
세계적인 교과서 연구소인 게오르그-에커트 연구소 부소장으로 있으면서 독일-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교과서 개발에 참여했고, 퇴임후 지난 8월 재단 해외초빙 학자로 서울에 머물던 팔크 핑엘 박사를 만났다. _ 편집자 주
한국은 자주 왔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8월 한 달 내내 한국에 머물렀다. 이번 방문의 목적은?
교과서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쟁점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연구하면서 한국의 교과서 저자들, 역사가들, 교육 전문가들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왔다. 지금은 국내외의 집단 기억을 형성하는 학교수업과 기념의 정치, 학술연구의 내적 상관성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연구를 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교과서 논의에서, 풍부한 시민사회와 보다 학구적 성향의 활동가들에 의해 지난 십수년간 계속되어 온 정치적 접근은 최근 들어 끝이났다. 이것은 특별히 한국에 해당한다.
두 나라 또는 세 나라 가 함께 쓴 역사쟁점을 다룬 교재들이 많이 출판되었다. 한국 체류와 연구는 이런 성과들을 살펴보고 이해를 넓히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공동 교과서 개발과 출판에 참여한 사람들, 단체와 연구소 대표자들을 인터뷰하고 있다. 또한 한편에서는 놀랍게 변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화해를 가로막는 요소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현대사의 기억 기념 문제에 대한 생생하고 구체적인 통찰을 얻기 위해 관련 장소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얼마 전 인터뷰에서 공동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국가 간의 차이를 좁히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대신, 자국의 한계를 반성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독-폴란드 공동 교과서 작업이 시작될 당시 독일 교과서가 가진 문제는 무엇이었나?
독일-폴란드 공동 교과서는 아직 만들고 있는 중이라서 여기서는 특히 1950년대부터 독일 게오르그 에커트 국제교과서 연구소가 추진한 독일-프랑스 공동 교과서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역사 교과서 발간 전에 학계, 교사, 교육자는 물론 학생들이 서로 심도 있는 의견을 나누면서 다행스럽게 많은 쟁점들은 해소되었다.
독일-프랑스 공동 교과서 회의는 예컨대 프랑스 혁명 때의 테러, 나치 지배 하 프랑스 시민들에게 가한 독일의 범죄행위, 마찬가지로 프랑스 레지스탕스, 베르사이유 조약과 같은 두 나라 교과서에서 논쟁이 되고 있거나 전혀 달리 다루고 있는 주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조언했다.
역사교과서는 민족적 관점에서 시작한 것이고, 따라서 이웃이든 멀리 떨어진 나라든, 우리가 가진 특정한 삶의 방식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타자와 타자의 문화를 열린 눈으로 보는 것은 쉽지 않다.
독일-프랑스 사이의 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을 보면 프랑스 역사가들은 소위 "인도적 간섭" 같은 미국식의 국제정치 개념에 보다 비판적이다. 하지만 현대의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설명과 해석을 들려줌으로써 학생들이 자신의 합리적 의견에 따라 비교도하고 따져도 보면서 스스로 배우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이 각각 공동의 역사인식을 목표로 위원회를 만들어 연구하고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성과는 미미하다. 특히 여전히 상대방 역사 교과서의 문제를 지적하며 사회적 국가적 논란을 빚고 있는 데 이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일, 중-일 공동 역사연구위원회의 활동 결과가 신통치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파트너로 참여해서 이미 성취한 것들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동아시아 교과서 논의가 가진 단점 중 하나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나왔고, 학자와 교사 학생들은 모여서 민족적 자존심이 걸린 민감한 현안을 놓고 의견을 나누었던 긍정적인 경험을 되돌아보고 있다.
중국에서는 제한적이지만, 한국과 일본에는 시민단체와 전문성을 가진 협의체들이 상대 역사에 대한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려는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한-일, 중-일 사이의 역사 공동연구위원회 활동은 아직도 주저하고 있는, 특히 일본의 정치인들이 무시할 수 없는 확실한 기초를 제공했다.
오랫동안 여러 나라의 교과서를 연구하고 공동 역사교과서 운동에 참여해 유럽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최근에는 독일과 러시아도 공동 역사교과서를 만들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독일-러시아 공동 교과서는 독일-폴란드, 프랑스-독일의 사례와 비교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교사 협의회, 학자 또는 유럽 각 지의 정부 당국이 추진하는 공동 교과서 발간 계획에 독일-프랑스 교과서가 하나의 전범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교과서들이 언론으로부터 최초로 만들어진 두 나라 공동의 역사 교과서로 큰 주목을 받았던 독일-프랑스 교과서처럼 다방면으로 널리 보급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계획 단계인 독일-러시아 공동 교과서는 독일-러시아 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계층에서 사용될 것이다.
현재까지는 유럽에서도 두 나라 사이의 공동 역사교과서를 발간했어도, 세 나라 이상 혹은 유럽 전체의 공동 역사교과서는 없다. 그게 가능할까? 특히 동아시아에서 한·중·일 세 나라 공동의 역사 교과서가 가능할까?
유럽을 보자면, 다른 공동 교과서 계획은, 예를 들어 헝가리-루마니아 교과서 개발과 같이 독일의 참여 없이도 진행 중이다. 우리는 또한 교과서를 기술할 때 좀 더 철저하게 민족적 접근을 넘어서야 하며, 유럽 전체 또는 세계 전체를 염두 하면서 역사를 기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일 등 유럽에서 공동 역사교과서는 실제 교육현장에서 어떻게 활용되나? 자국사 대신 공동 교과서를 가지고 수업을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정확한 답을 하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다. 왜냐면 총 3권으로 이뤄진 독일-프랑스 공동 교과서에서 중세를 다룰 시리즈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사를 다룬 1권은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출판시장에서 굉장한 성공을 거둔 것에 비하면 학교에서는 많이 채택되고 있지는 않다. 두 나라 모두에서 교사와 학교가 어떤 책을 채택할지를 정할 때 공동 교과서는 다른 교과서와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2012년부터 동아시아사를 학교에서 가르치게 된다. 한편에서는 한국사(국사)를 필수 과목이 아닌 선택으로 배우게 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사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유럽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가?
유럽은 일반적으로 자국 역사와 유럽사, 세계사를 통합해서 가르치고 있다. 수업, 교과과정, 교과서에서 이들 주제들은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세계화 시대에 한 나라의 역사와 지리는 넓은 국제적 맥락 안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럽과는 달리 한·중·일과 아시아는 아직도 민족적 자긍심을 국가발전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유럽의 공동 역사교과서 경험이 아시아의 이상적 모델이 될 수 있을까?
유럽의 공동 교과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며 이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무비판적으로 모방해서는 안 되고 지역의 특성에 따라 채택되어야 한다.
재단에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 대만과 미국 등 5개 나라 역사 교과서를 비교 분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공식적인 공동 교과서는 아니지만, 민간 차원에서 만든 공동의 역사교재를 심화시키는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이 외에 공동의 역사인식, 공동의 역사교과서 발간을 위해 재단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장은 공교육 현장에 맞는 공동 교과서에 너무 포커스를 맞추지 말아야 한다. 유럽의 예를 보더라고 그것은 장기 계획의 마지막 단계였다. 공동 정규 교과서(교사용 참고서나 부록과는 다른)는 동아시아에서는 아직 여백으로 남아 있다.
공동의 역사인식이나 공동의 역사교과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어려운 곳에서는 이들 이슈들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이론적 개념에 관한 논쟁을 강화하면서 학술 교류, 공동 연구 결과의 축적에 무게를 두는 것이 우선이다. 차이를 수용하는 것이 공동의 역사인식 기반을 다지기 위한 선행조건이다. 이 과업은 동아시아 교과서 논쟁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팔크 핑엘(Falk Pingel)
1944년 독일 단치히 출생. 빌레펠트대학(Bielefeld University)을 졸업했고 1993년부터 2009년까지 독일 게오르그-에커트 국제교과서 연구소 부소장, 유네스코 독일위원회 교육위원(Education Committee of the German Commission for UNESCO) 등으로 재직하며 독일-이스라엘 교과서, 남아프리카, 발틱 연안과 중동, 동아시아 여러 국가의 역사 교과서와 교육과정 개발에 참여했다. 논문으로는 "교육을 통한 갈등 극복과 상호이해의 촉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