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방학때의 고국 방문은 좀 특별했다. 미국 전역에서 선발된 21명의 고등학교 교사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이번 답사는 미국의 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아시아 역사 문화를 교육하고 있는 NCTA(National Consortium for Teaching about Asia)와 동북아역사재단이 미국의 차세대 지도자를 교육하는 고교 고급반 (AP, Advanced Program) 세계사 교사들을 위해 특별히 기획한 현지 역사 답사였다.
프리만 파운데이션(Freeman Foundation)의 지원으로 설립한 NCTA는 중고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아시아 역사문화 교육을 실시하는 권위 있는 미국 기관이다. 이번 답사에 참여한 교사들은 지역 대학을 통해 이미 한 학기 분량의 NCTA 아시아역사 세미나를 이수했으며, 그 후에도 아시아 관련 커리큘럼 개발 모임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중국과 일본을 1회 이상 답사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교사들이었다.
이번 답사는 무엇보다도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이들 교사들, 지식과 문화적 체험이라는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중국과 일본에 친숙한 교사들에게 한국의 입장에서 동북아의 역사 현안을 환기시키고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아시아를 이해시키는 기회를 가졌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이런 점에서 NCTA가 자체로 운영하는 다른 답사들과는 차별화된 현장이 '살아 있는' 답사였다.
교사에게 교재와 커리큘럼 개발 권한을 주는 미국 교육
미국의 교육은 지역적으로 매우 다양하게 운용되지만 역사 과목의 경우 대체로 초등, 중등과정에서 미국사와 고대사, 중세사 등을 사회과 과목으로 가르치고, 8~9학년이 되면 세계사, 세계문명사, 세계지리 등의 이름으로 전 세계 문명, 역사, 지리를 체계적으로 다룬 과목들을 가르친다. AP 역사과목은 중학교에서 미국사 등을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한 학생들에게 9학년부터 제공되는데, 대개 대학 수준의 교재와 커리큘럼으로 짜여 있다. AP 세계사는 보통 2년의 장기 코스로 동서양의 고대사부터 현대사를 아우르는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공공기관이 아니라 민간기관인 "College Board"가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AP 테스트를 통해 학업 실력을 평가하게 된다.
미국의 교육은 교사에게 교재 선택에서부터 커리큘럼 개발, 학생 지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수업에서 교사 개인의 성향이 대단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자율적 커리큘럼 선택이 가능하도록 하는 방대한 교재 교구 시장이 존재한다. 현재 일반적인 AP 세계사 과목은 교재마다 다소 차이가 있으나 3회 정도에 걸쳐 독립된 주제로 한국사를 다루고 있다. 한국 고대사는 중화문명 확산이라는 관점에서 베트남과 함께 잠시 언급한 다음 훌쩍 건너 뛰어 2차 대전을 전후하여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다루며, 마지막으로 전후 남한의 경제성장을 소개하는 식이다.
대부분의 교과서는 사진과 함께 각각 2~4쪽 분량을 할애해 각 주제 속의 한국사를 소개하고 있으나 교과서들이 평균 600~800여 쪽에 이르는 점을 생각하면 지극히 미미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며, 주요 문명국으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다. 또, 적지 않은 경우 한국을 중국과 일본 문명 사이에서 그들의 영향을 받은 작은 나라 정도로 묘사하고 있으며, 잘못된 동해 표기처럼 그릇된 정보도 적지 않다. 결국 한국사는 매우 제한된 범주 내에서, 현대사에 초점을 맞춰 다루고 있는 셈인데, 이런 경향을 반영하듯 이번 답사에서 DMZ와 제3땅굴을 방문했을 때 많은 교사들이 다양한 기념품을 교구로 구입하는 등 특별한 호응을 보였다.
부쩍 높아진 관심 더 많은 한국사 교육으로 이어질 것
답사에 참가한 한 교사는 교과서의 편제와는 무관하게 한국 역사문화를 비중 있게 가르치기 위해 연 10시간(2주) 정도를 할애한다고 했고, 또 다른 교사는 교과서에 없는 내용을 스스로 학습하고 인근 한국마켓에서 한복, 부채 등 한국관련 자료들을 구입해 활용한다고도 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이번 답사가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미국으로 돌아온 참가자들이 서로가 촬영한 사진자료들을 웹사이트를 통해 공유하고, 방한 때 미처 구입하지 못한 영상자료를 한국에 단체로 주문 구입하면서 한국사 교안작성 작업에 시간을 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미국으로 돌아온 뒤 각각 자신 있는 주제를 교안으로 만들어 다른 참가자들과 같이 공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답사의 기획자이자 인솔자로 이들과 함께 한 10일간의 여행은 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의 역사문화교육이 가지는 중요성을 확인하는 좋은 계기였다. 아울러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토론 속에 이들의 눈에 비쳐진 오늘 한국의 모습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였다. 대부분의 교사들의 눈은 100년 전 조선을 찾았던 '파란 눈의 이방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새롭고 발전된 것보다는 낡고 오래된 것에 더 오래 머물렀고, 서울의 화려한 빌딩숲과 너무나도 깔끔히 단장된 고궁들을 돌아보며 600년 도읍의 향기가 아니라 'new money'의 냄새가 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회마을 어귀에서 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가 수많은 사진을 찍은 곳은 다름 아닌 길 양쪽으로 펼쳐진 논이었다. 쌀 문화에 대해 가르치면서도 한번도 논을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한국의 논은 평범한 것을 신기한 것으로 만드는 문화적 다양성의 기적을 보여주었다. 새벽 5시, 딱딱한 마룻바닥에서 1시간의 명상 수행에 참가했던 교사들은 강원도 산중에서의 이 특이한 수행 경험을 인생을 바꾼 잊지 못할 경험이라며 서울로 올라와서는 앞 다퉈 먹물 옷 한 벌씩을 구입해 갔다. 이들 중 한 사람이 며칠 전 소식을 전해왔다. "희정, 난 요즘 매일 아침 스님 옷을 입고 한국을 생각하면서 모닝커피를 마신다우. 한국이 나에게 이렇게 소중한 나라가 될 줄 누가 알았겠수?"
개인적으로는 1년 동안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땀 흘린 보람을 느낀 답사였다. 몇 년 전 논란을 일으켰던 《요꼬이야기》 추천도서 채택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 개개인의 관심 없이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올바로 이해시키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