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 동아시아는 당제국(唐帝國)을 주축으로 형성된 국제관계의 틀 속에서 보기 드문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이 시기 신라와 발해, 그리고 일본의 대당(對唐) 교섭은 전례 없이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비록 신라와 발해는 서로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었으나 양국 모두 일본과 긴밀한 교섭을 유지했다. 실로 이같은 국제관계를 기조로 하여 각국 간 문화 교류와 물자 교역에 눈부신 진전이 있었다.
지난날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군장(君長)들이 중국 황제로부터 관작을 받는 책봉 형식으로 국제적인 관계를 성립시켰고, 그 기반 위에서 중국의 법제도와 문화를 왕성하게 수용한 사실을 근거로 '동아시아세계'라는 개념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다고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일부 논자(論者)들은 8~9세기 동아시아 국가들은 외형상 정치형태나 신분제도, 토지제도 및 농민 지배방식이 서로 비슷한 면이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 사회적 토대를 달리하는 성격이 있으며, 역사적 발전단계가 같지 않은 데서 기인하는 구조적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동아시아세계론'에 대해 이론(異論)을 제기하기도 했다.
신라와 발해, 일본과 당의 중계 역할을 하다
이같은 이론 제기에는 확실히 수긍할 점이 있다. 실제로 종전의 '동아시아세계론'에는 일본사(日本史)의 특수성이라는 문제가 중점에 놓여 있어 그 표방하는 바 일국사(一國史)의 논리를 극복한다는 문제의식이 희박해졌다. 더욱이 8세기를 전후한 동아시아 역사 추이를 살펴볼 때 한·일 양국과 당의 관계뿐만 아니라 한·일 양국 간의 관계가 때로는 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었음이 주목된다. 이를테면 신라와 일본 양국 모두 670년 경부터 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대략 30여 년 간 당과 공적인 교섭이 단절되어 있던 기간에 서로 밀접한 관계를 줄곧 유지했다. 특히 이 시기 외교 사절을 따라 신라에 유학온 일본 유학생과 유학승들이 신라 독자의 율령 정치제도(비록 당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을 다소간 변형시킨 것이지만)를 비롯하여 학예·사상 등을 받아들였다. 특히 아스카(飛鳥)시대를 통해 씨족불교 단계에 머물러 있던 일본 불교계가 하쿠호우(白鳳)시대에 들어와 국가불교 단계로 진입하게 된 데는 이 시기 신라 불교계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평가된다.
이같은 현상이 비단 신라와 일본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8세기를 통해 일본은 발해를 경유하여 견당사(遣唐使)와 유학생을 당에 보낸다거나 혹은 발해로부터 중국 대륙의 최신 정보를 입수했고, 때때로 당에 잔류하고 있는 일본 외교 사절·유학승과의 연락 사무를 발해 사신 편에 의뢰하기도 했다. 일본조정이 안사(安·史)의 대란(755~763)이 일어난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게 된 것도 견발해사를 통해서였고, 귀국 도항에 실패하여 당의 수도에 장기간 체류하고 있던 견당대사 후지와라노 키요카와(藤原淸河)를 무사히 본국에 귀환시키기 위해 발해 측의 협조에 큰 기대를 걸 정도였다. 이처럼 일본과 당 사이에서 발해가 연출한 일련의 중계 역할은 일본 무녀(舞女)의 당 공상(貢上), 발해를 경유한 불전의 입수, 고급 물품에 속하는 대모(玳瑁)로 만든 술잔, 사향(麝香)의 수입 등 중계무역 분야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
8세기 동아시아의 주변에서 중심을 바라보다
종래 동아시아 문화교류에 대한 연구는 어디까지나 중심에서 주변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고착되었다. 그러나 '주변의 창조'라는 현상에 착안하여 오히려 주변에서 중심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7~9세기에 동아시아 각국 불교계는 국가를 초월하여 유기적으로 연결된 독자적인 불교권을 구축했는데, 이같은 불교권이 당을 주축으로 성립된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주변국가의 기여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든다면 불교 경전 중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은 인도 불경에는 없는 위경(僞經)임이 분명한데, 당대에 나온 《대주간정록》(大周刊定錄, 695년)에는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원효대사(617~686)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저술한 것으로 미루어 신라에는 이미 7세기 중반경에 《금강삼매경》이 알려져 있었다. 한국과 미국의 일부 연구자들은 출처가 분명치 않은 《금강삼매경》이 어쩌면 신라 승려에 의해 저작되어 당으로 전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에서 신라를 비롯한 발해·일본 등 주변국가들이 비록 당에 조공을 바쳐 사대의 예를 표했으나, 불교계에서는 은근히 당의 권위에 대항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8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상》은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과 취지에서 동아시아 역사상 국제관계가 가장 안정된 구조와 상태를 보여주는 8세기 역사상(歷史像)을 추구한 논문 12편을 모아 발간하였다. 이들 논문은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전반적으로 다룬 총론에 해당하는 3편의 논문을 제1부, 이를 각국별로 다룬 6편의 논문을 제2부, 그리고 특수한 주제를 다룬 3편의 논문을 제3부로 배정하여 편집했다. 제1부 논문들은 그간 역사학계에 축적된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8세기 동아시아 역사의 성격을 다룬 것으로 한·중·일 세 나라 학계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이를테면 베이징대학 왕지아오푸(王小甫) 교수는 당과 신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야말로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균형을 잡는 역할을 했다는 견해를 제시하면서도 통일신라와 발해를 한국사의 남북국 시대로 파악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 점이 주목된다. 다만 당시 동아시아가 지역사회에서 다원화 사회로 전환하고 있던 것으로 파악한 점은 대국적(大局的)인 관찰의 성과다.
제2부 논문들은 당·신라·발해·일본 4국의 대외관계를 다루었는데, 신라와 일본 사이에서 외교적 마찰을 일으킨 이른바 빈례(賓禮) 문제는 일본 조정의 대신라관계를 논한 연민수 연구위원이 논문에서 상세하게 검토하였다. 즉 신라의 삼국통일은 일본이 신라를 적대시하는 원천이 되어 신라 국제(國制)를 능가하는 규모의 천황제 율령국가 건설을 목표로 매진하는 과정에서 이를 법제화했으나, 신라가 현실 외교 의례 무대에서 번번히 번례(蕃禮)의식을 거부하여 양국 간 외교적 마찰만 되풀이 되었을 뿐 끝내 파탄으로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제3부 논문들은 당·신라·일본 3국의 도성제(都城制)라든지 불교 교류, 해상교역 활동 등 각기 특수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 중 당 도성제를 모방한 신라 방리제(坊里制)와 일본 조방제(條坊制)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논한 큐슈대학 사카우에 야스토시(坂上康俊) 교수의 논문은 장차 동아시아 제국의 도성제 연구에 새로운 과제를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