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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20세기 중국 민족주의의 아이콘 쑨원
  • 오병수 정책기획실 연구위원
1912년 임시대총통 시절의
쑨원

올해는 1911년 10월 중국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다. 국내외 곳곳에서 기념 학술회의가 한창이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이 들어선 이 사건을 기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해혁명을 통해 2,000년 이상 중국을 지배했던 황제지배 체제가 전복되고, 동아시아 최초로 공화정이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화(共和)의 이념은 이후 중국 국민국가 건설의 이념적 뿌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에 신음하고 있던 동아시아 각국에 전파되어 민족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신해혁명과 관련해서 재조명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쑨원(孫文)이다. 그가 삼민주의(三民主義), 동맹회(同盟會)와 함께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에서 쑨원은 100주년을 맞는 신해혁명과 함께 '진흥중화(振興中華)', '애국주의의 선구'로서 환기되고 있다. 《인민일보》는 물론 후진타오(胡錦濤)가 앞장서서 이를 주창하고 있다. 물론 쑨원은 양안에서 여전히 국부(國父)로서 추앙받고 있는 중국의 영웅(英雄)이자 우상(偶像)과 같은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환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신해혁명, 국민혁명을 주도한 직업적 혁명가일 뿐 아니라, 20세기 중국 민족주의의 대변자인 까닭이다.
쑨원은 1866년 광동성(廣東省) 향산현(香山縣)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궁벽진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3세 이후, 맏형 쑨메이(孫眉) 덕택에, 하와이와 홍콩에서 서구 기독교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홍콩에서 청년기를 보냈고, The Collage of Madicin for Chinese를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다. 재학 당시 중국 초기 영국 유학생인 허치(何啓), 우탕팡(伍廷芳) 등의 지도와 홍콩의 개방적인 조건 속에서 서구 계몽사상을 익혔다.

쑨원은 가족이 하와이 이주 노동자(苦力)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가난한 농촌에서 자랐고, 또 태평천국의 전사(戰士)로부터 홍슈취앤(洪秀全)의 영웅담을 들으면서 사회의식과 반만의식(反滿意識)을 길렀다. 애초부터 두드러진 민족주의자나 혁명가는 아니었다. 오히려 우상 숭배라 하여 고향 마을 목신(木神)을 절단, 마을에서 추방당할 만큼 기독교에 심취하였고, 1894년에는 리홍장(李鴻章)을 찾아가, 양무론적 제안을 제시하면서, 서구 지식을 알고 있는 자신을 막료로써 천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곧 터질 청·일전쟁 때문에 조선 문제에 몰두하고 있던 리홍장은 그를 만날 시간이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때 쑨원이 리홍장의 막료가 되었다면, 혁명가가 되지 않았을까?

청조의 탄압으로 혁명가가 되다

쑨원은 1894년 제2의 고향인 하와이에서 반만단체인 흥중회(興中會)를 창립하며 혁명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홍콩으로 옮겨 양취윈(楊衢雲) 등 회당 세력과 결탁, 구체적인 혁명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회당(會黨) 세력과 연계하여 시도한 봉기가 준비 미숙으로 실패하자 청조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곧 세계 여행을 떠났다.

변방의 작은 치안 사범에 불과하던 그가 중국의 대표적인 혁명가로 등장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청조의 탄압 때문이었다. 1896년 런던 청나라 공사관에 체포 구금되어 본국 송환을 기다리던 그의 사정을, 당시 영국 기독교 선교사와 언론이 대서특필하였고, 영국 정부가 중국 공관에 압력을 넣어 그를 석방시키면서, 일약 중국의 저명한 혁명가로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쑨원의 글씨

당시 영국 체험은 혁명가로서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첫째, 대영박물관에서 집중적인 독서를 통해 자본주의 폐해, 서구 사회주의 사상 및 운동 등 서구 사정에 대한 기본 인식을 습득하여 삼민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둘째, 중국의 대표적인 혁명가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일본의 아시아주의자 및 우익들의 정치적 지원을 확보하였다. 셋째, 동경 유학생 등 신식 지식인 집단을 대표하는 정치적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쑨원은 민족, 민권, 민생 등 삼민주의를 정치 강령으로 제시하고 제 혁명 세력을 통합하여 본격적인 반청 혁명을 추동하였다.

물론 그의 혁명활동이 늘 성공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수차례 실패를 좌절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지속적으로 혁명 이념을 심화시키고, 방략을 개발하는 계기로 삼았다. 1918년 호법정부에서 쫓겨난 뒤 상해에서 《건국방략》(建國方略)을 구상했던 점이나, 오사 이후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국민혁명 이론을 개발하고, 국민당 개조를 통한 혁명 역량강화, 그리고 소련의 정치 군사적 원조를 받아 북벌을 감행으로써 국민정부 수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예다. 혁명가로서 그의 낙관주의가 뒷받침 된 까닭이다.

바람직한 동아시아 지역질서 모색을 위한 새로운 해석 필요

한국과 쑨원의 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점이 주목받아 왔다. 하나는 신해혁명 이래 한국 독립운동 후원문제와 다른 하나는 그가 강조한 대아시아주의 문제다. 신해혁명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기대가 컸던 만큼 쑨원과 한국 독립 운동은 태생적으로 관계가 깊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쑨원의 후원은 그의 일차적 목표인 중국 국민국가 건설에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쑨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문제에 매우 소극적이었고,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 역시 중국에 위협적이지 않는 한도로 제한하였다.

한편 쑨원의 정치주장은 아시아 민족해방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1925년 그가 주장한 대아시아주의는 대표적인 반제 주장으로 약소민족지도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제국주의에 대한 아시아 연대론 형태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일의 지도를 전제로 하고 있어 조선 지식인들의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의 민족주의 주장이 애초 반만혁명에서 오족공화론으로, 1920년대 이후 다시 한족 중심의 민족동화론으로 변모하는 등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 혐의가 뚜렷하고, 전통시대 중화주의적 발상에 기초한 영토관념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음미해볼 대목이 많으며, 이는 20세기 중국 민족주의가 갖는 이중성이라 할 수 있다.

애초 신해혁명이 조선 지식인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던 것은 열강 침략을 대면하고 있던 동병상련의 처지가 크게 작용하였다. 쑨원의 민족운동이 조선에 상당한 호감으로 다가온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나 현재 쑨원은 중국의 새로운 민족주의 아이콘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의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