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stion
고구려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능선을 따라 이편에서 저편으로 장대하게 펼쳐진 산성이다. 고구려인들은 왜 그토록 많은 산성을 쌓았을까?
Answer
고구려 성곽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도 200여 개가 넘는다. 1,000여 년이 넘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인들이 남긴 역사유산은 여전히 살아남아서 전해져 오고 있다. 이들 성곽은 입지조건에 따라 평지에 자리잡은 평지성(平地城), 험한 산세를 이용한 산성(山城), 그리고 양자를 결합한 형태인 평산성(平山城)으로 구분된다.
북한 평양 시가지를 에워싸고 있는 장안성(長安城)은 평지와 구릉, 그리고 산을 품고 있는 전형적인 평산성에 해당한다. 중국 집안시(集安市) 시가지를 에워싸고 있는 국내성(國內城)은 고구려 초중기의 도성으로 평지성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고구려 평지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고구려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역시 옥수수 알갱이처럼 잘 다듬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성벽, 그 선이 능선을 따라 이편에서 저편으로 장대하게 펼쳐진 모습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도 고구려 성곽의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성곽은 산성이다.
어째서 고구려인들은 산성을 저리도 많이 쌓았을까. 먼저 생각나는 것은 고구려가 본디 산이 많이 지역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이다. 고구려인이 처음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졸본(卒本)이나 두 번째 왕도인 국내성 지역 모두 산간지대에 속한다. 그래서 초창기 나라 힘이 미약할 때 외세가 함부로 넘보지 못하도록 산세에 의지하여 성곽을 쌓았다고 볼 수 있다. 가파른 산세를 이용하여 성벽을 둘러 적의 공세를 약화시키고 일대를 감제(柑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경험을 체득하면서 고구려 산성 축조 기술은 발전을 거듭하였을 것이다. 또 그래야만 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을 확보하기 위해 선비 모용씨(鮮卑 慕容氏)와 대결하였고, 중원(中原)을 통일한 수·당의 집요한 침입에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수적으로나 국력면에서 월등한 상대에 맞서는데 산성은 효과적인 방어벽이 될 수 있었다. 즉 잘 쌓은 산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렇지만 고구려의 산성을 전쟁용 방어시설 혹은 유사시 피난처로만 보는 것은 곤란하다. 전쟁터가 되기 십상인 국경부근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산성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곳곳에 마련한 지방 거점에도 산성을 쌓았다. 산성은 지역 관아가 들어서 있는 읍내이고 도청 소재지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러한 산성의 성벽 안쪽 공간에는 거의 예외없이 널직한 평탄지가 있어, 주민 거주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산성일수록 평지로부터의 진입이 용이하다는 특징을 보인다. 답사를 나가보면 어느 틈엔가 성 안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곤 하였다.
이러한 고구려 산성의 특징으로 미루어, 초기에 구축된 산성은 주로 산 정상부에 자리잡았으며, 중후기로 갈수록 능선으로 둘러싸인 넉넉한 공간과 수원(水源)을 성 안에 품은 산성이 축조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구려 산성에 대한 이해는 이제 겨우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남겨진 성곽이 담고 있는 과거의 정보는 여전히 두터운 성벽이나 깨진 기와와 토기편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