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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동북아 역사분쟁에 대한 전망과 우리의 자세
  • 한석정 동아대 부총장

근래 외신은 일본의 영화감독 오시마 나기사(大島渚)의 죽음을 전한다. 그는 〈감각의 제국〉(1976)으로 세계적인 이름을 얻은, 섹스를 권력(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삼는 특이한 장르를 개척한 인물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1983)에서 그는 태평양전쟁에 끌려간 조선인의 강제할복 장면을 통해 조선인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시마와 같은 깨어있는 지식인들은 한국 사회에 먼 존재이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을 하나의 범주로 인식하는 민족주의 교육 탓이다.

2013년 동아시아의 정세 분석

전후 유럽이 2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씻고 공동역사의 기술로 나아간 데 비해, 2013년 벽두의 동아시아는 일본에 영토와 과거사에 절대 양보를 않겠다는 극우정권이 들어서고 분쟁지역인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상공에 양국 전투기가 날아다니는 등 전운이 감돈다.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파고는 독도의 바위를 때리는 겨울 파도만큼 아직도 거칠다. 글로벌 시대의 1부 리그에서 탈락중이라는 일본은 국수주의의 유혹에, 새 강대국 중국은 중화주의라는 폐쇄적인 묘약에 빠져들고 있다. 향후 동북아 역사분쟁에는 일본의 불감증, 외부(미국) 요인 외에 중화주의라는 새 것이 추가되었다.

중화주의는 중화 조공질서라는 중국인들의 전통적 기억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기실 사회학적ㆍ군사적 해석이 가려져 있다. 기차 발명 전까지의 원정(袁征)은 온 국력을 소진시킨 국가사업이었다. 고대 통치자들이 수도를 최장 기간 비울 수 있는 기간은 석 달 정도였다(McNeill,1982). '오랑캐'들은 중국의 원정거리 밖에서 살아남은 존재들이었다. 양자의 합리적 선택-경제적인 이유로 침략을 자제해야하는 강자와, 갉작거리되 심한 도발을 자제해야 하는 주변국들의 현실-이 만난 지점이 이른바 '조공'이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 조공의 기억은 긴 수직적 질서이다. 지난 2008년 여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뿜어 나온 중국의 자부심은 패권주의로 서서히 이행 중이라는 분석이 많다.

일본 제국주의가 이웃 나라들에 끼친 피해와 전후 일본지도자들의 불감증은 아무리 지적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나치세력을 몽땅 처단하고, 동구권에 충심으로 사죄한 전후 독일의 행보와는 큰 대조를 이룬다. 며칠 전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총리가 중국 난징(南京)을 방문, 과거 학살에 대해 사죄했지만 이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동북아 역사분규에는 미국이라는 외부 요인도 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미국사회에서 적국 일본의 천황을 처형시키자는 여론이 들끓고, 강경한 전후(戰後) 일본대책이 제안되었다. 일본사의 권위, 노르만(E. H. Norman)도 '정치적 문제의 해결'(수구세력의 몰락)을 우선의 과제로 꼽았다(자세한 내용은 근자에 필자가 입수한 노르만의 비망록[1944. 9. 22] 참조). 그러나 동아시아의 냉전사태로(한 때 미국에 도전했던) 일본 경제, 혹은 '동아시아의 공장'의 폐업이 아닌 회생으로 미국정책이 극단적으로 전환했다(Schaller, 1985). 이와 함께 극악무도한 생체실험을 포함, 정치 문제의 해결도 묻혀버렸다.

2013년 동아시아 역사지도의 변화 양상

사의 권위, 노르만(E. H. Norman)도 '정치적 문제의 해결'(수구세력의 몰락)을 우선의 과제로 꼽았다(자세한 내용은 근자에 필자가 입수한 노르만의 비망록[1944. 9. 22] 참조). 그러나 동아시아의 냉전사태로(한 때 미국에 도전했던) 일본 경제, 혹은 '동아시아의 공장'의 폐업이 아닌 회생으로 미국정책이 극단적으로 전환했다(Schaller, 1985). 이와 함께 극악무도한 생체실험을 포함, 정치 문제의 해결도 묻혀버렸다.

양국 만주 그룹의 결합은 경제 원조에 국한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만주국 건국에 관한 에토스, 개발체제 전반, 즉 군부에 의한 신속한 건설과 공업화, 키시가 담당했던 통제경제, 그리고 전시(戰時)하 사회동원 등이 국가경영의 중요 요소로 재현되었다.

중국은 이른바 '동북공정'류의 완만한 침식을 할 것이지만, 친밀한 한중관계를 깨뜨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에 비해, 중일전쟁(1937~1945) 시 천만 명 이상의 중국인 희생자를 초래했던 일본과의 관계는 점차 긴장국면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지난 부시(George W. Bush)정권 초 중미 외교갈등(남중국 해역에서 중국을 탐사하던 미국 경보기의 격추로 야기된)을 맞아 적잖은 불안감을 표출했듯 미국 군사력(그 연장선에서 미일 동맹)의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

소니 등 일본의 반도체산업을 꺾은 경제파워인 한국의, 더구나 안보관이 투철한 박근혜 정부가 독도문제에서 양보를 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런데 첨예한 중일 분쟁과 그 반사이익(?)으로 한일 분쟁은 축소될 것 같다. 독도문제는 오랜 관행-일본의 망언과 규칙적인 한국인들의 규탄 후 원래의 밀접한 경제협력과 문화교류로 복귀하는-을 반복할 것이다. 무엇보다, 양국 지도자나 젊은이들은 군사적 대립을 전혀 옵션으로 여기지 않는 긴 평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한일 역사는 악화도 개선도 아닌 장기적 흐름 속에 있을 것이다. 미국은 자국내 민주, 공화당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역내의 패권유지라는 당면목표를 위해 앞으로도 한일의 우방으로서, 혹은 중미 양극체제의 동반자로서 과도한 동북아의 역사 갈등에 은밀하게 개입할 것이다. 극우정권이라 하지만 허약한 아베정권이 미국의 압력에 저항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2013년도 역사지도도 표면상의 파고와는 달리 지난 수 십년의 긴 흐름 속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동아시아의 공존과 평화의 필수조건

궁극적으로, 동아시아의 공존과 평화는 외부가 아닌 아시아인들의 노력에 달려있다. 동북아 3국은 이미 밀접한 경제파트너가 되었다. 동북아의 지식인들은 진정한 화해를 통해 과거사를 해결한 유럽인들의 성숙을 배울 필요가 있다. 분쟁 발생 시 모든 채널을 가동, 화해에 앞장서야 한다.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도 편협한 민족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시선의 확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역사분쟁에는 일시적 흥분이 아닌 연구인력과 자료의 확보 등 꾸준한 연구가 그 해답이다. 이것에는 중국 국민당, 중국 공산당, 한국의 이선근 등이 설립한 국책연구소(중앙연구원, 사회과학원, 정신문화원 등) 류가 아닌 정치와 이념에 초연한 연구소의 독립도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