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우리 언론의 주목을 끈 것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 비석이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고구려비가 실제로 발견된 날짜는 2012년 7월 29일인데 그동안 현지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조사와 비문을 판독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2013년 1월 4일자 중국 국가문물국의 소식지인 『중국문물보』에 실리면서 공개되었다. 고구려와 관련 된 비석이 발견된 일은 드문 일이어서 매우 흥분되는 상황이었다. 고대사를 연구할 때 자료 부족 때문에 늘 갈증을 느끼는데 고구려사는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금석문은 당시 사람들이 직접 제작한 것이기 때문에 그 가치는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고구려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
현재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로 고구려 2대왕인 유리왕 22년(AD 3)에 졸본성(오늘날의 중국 요녕성 환인)에서 천도하여 20대왕인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400여년 동안 고구려 정치ㆍ문화ㆍ사회의 중심지였다. 집안시에는 평지성이며 왕성인 국내성(國內城)이 있고, 환도산성이 있으며 그 일대에는 1만여 기가 넘는 고구려 시대의 무덤들이 있다.
이번에 발견된 고구려 비석은 집안과 단동간의 고속도로에서 4.3km 떨어진 지점인 마셴하(馬線河)의 오른쪽 물가 모래톱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눈이 쌓여 있으나 구마셴교(舊馬線橋)와 신마셴교(新馬線橋) 사이의 중간 지점이다. 석비가 발견된 지리 지형은 분지형태로 이곳에는 700~800여기의 고구려 무덤이 분포되어 있다. 또 마셴묘군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천추총과 서대총 등 왕릉급의 무덤이 있다.
중국 언론 보도에 의하면 이 비석은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든것으로 길이는 173cm이며, 너비는 60.6cm~66.5cm. 두께는 12.5cm~21cm이고, 무게는 약 464.5kg이 된다. 현재 이 비석은 집안박물관에 보관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당국은 새로 발견된 고구려비를 '지안(集安)고구려비'로 명명하기로 했다고 한다.
비문은 모두 세로로 10줄로 쓰여져 있는데, 앞의 9줄은 매 줄마다 22자로 되어있고, 마지막 줄은 20자로 되어 있다. 전체 글자는 모두 218자이며, 오른 쪽 윗부분이 파손되어 10여 자가 빠져있다. 석비는 강가 둔치에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글씨의 흔적이 모호한 것이 많아 현재로서는 140자(字)를 확인하였다고 한다. 비석이 공개된다면 앞으로 더 많은 글자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지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 비문 분석
비문을 보면 고구려 왕실의 세계(世系)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다. 즉 고구려는 추모왕이 건국하였으며, 추모왕은 하백의 자손임을 언급하고 있다. 다음의 셋째 줄에는 수묘연호의 역할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시제사(四時祭祀)'에 관하여 명시하였다.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넷째 줄부터는 부족자(富足者) 즉 부유한 사람들이 수묘자(守墓者)를 전매(轉賣)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수묘인을 사고 파는 것의 심각성을 느끼게 서술하고 있으며, 비석에 연호두(煙戶頭) 20인의 이름을 새겼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장수왕 2년(414)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의 수묘인 기사와 비슷한 면이 많다. 이 비석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새로 발견된 고구려비에서 우선 주목해야 하는 것은 비석이 언제 세워졌는가이다. 현재까지 이 비석은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 때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연대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 중의 하나가 7번째 줄에 있는 "무□(戊□)"이다. 이 무(戊)자는 현재 자료로 제시된 비문에서 선명하나 그 다음 글자는 불명확하다. 그러면 광개토대왕을 기준으로 앞에 무(戊)가 들어가는 간지(干支)는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 5년(388)의 '무자(戊子)'년이 있고, 광개토왕 8년(398)인 '무술(戊戌)'이 있으며, 광개토왕 18년(408)인 '무신(戊申)', 그리고 장수왕 6년(418)의 '무오(戊午)'가 있다. 이들 간지 가운데에서 비석에 보이는 글자의 획으로 추정을 해보아야 한다.
이 비석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는 고구려가 수묘인(守墓人)들과 관련해서 광개토대왕비 외에 다른 비석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비가 국내성 지역에 있는 다른 왕릉에 관한 수묘를 모두 망라해서 서술한 것이라는 주장과 광개토대왕비 외에 다른 비석이 또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 비석이 발견됨으로써 좀 더 적극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이 비의 높이가 173cm라는 것도 유념을 해야 할 부분이다. 이 비석은 실질적으로 수묘인들을 매매하던 '부족지자(富足之者)'들에게 경고하는 뜻이 강하였다고 생각된다. 광개토대왕비는 너무 높고 거대하여 그 자체로서 위압감을 느낄 정도였으나 실제 읽힐 수 있는 부분은 한정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에 새로 발견된 고구려비는 충분히 읽힐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비석에 수묘인들이 '사시제사(四時祭祀)'하게 했다는 내용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수묘인들의 역할에 대해서 더 알 수 있게 되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수묘인들이 쇄소( :물을 뿌리고 청소하다)한다는 것만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 비석을 통해서 수묘인 즉 묘지기들의 역할에 제사를 준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광개토대왕이 생존시에 아들에게 자신이 정복활동을 벌여 새로이 획득한 '신래한예(新來韓穢)'인들을 수묘인으로 세울 것을 말하였다. 아들인 장수왕은 아버지의 유훈과 달리 '신래한예'인들이 '법칙을 알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慮其不知法則)', 신ㆍ구민을 220가(家)대 110가(家)로 구분하여 섞어 놓았다고 밝혔다. 새로이 수묘인에 편입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법칙'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수묘역(守墓役)과 관련한 각종 규정일수도 있고, 그들이 수행해야 하는 제사와 관련한 절차들도 포함되었을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시제사'라는 글자는 고구려의 제사제도 등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부분이다.
'연호두(煙戶頭)'라는 표현도 수묘인의 존재양상과 관련하여 매우 흥미롭다. 그간 수묘인에 관해서는 광개토대왕비에 씌여 있는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에 관해서만 알려졌었다. 이 비석에는 연호두 20인의 이름(人名)을 새긴다고 하였다. 광개토대왕비에서는 수묘인의 연호를 국연 몇 가(家), 간연 몇 가(家)라는 식으로 표시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이름을 새겨놓겠다고 하였다. 이름을 새겼다면 뒷면에 새겼을 터인데,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이상에서 간단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새로 발견된 고구려비는 고구려사를 이해하는데 좀 더 많은 정보를 알려줄 것으로 보인다. 이를 기초로 고구려사에 대한 인식은 한층 넓혀질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