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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Q&A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추진 경위와 역사적 의미는?
  • 하원호 동국대 교수

1876년 2월 조선은 최초의 근대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 조약')를 체결하였다. 우리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 조일수호조규의 내용과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일본은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조선의 문을 열려 했지만, 전통적 관계와는 다른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는 바람에 대원군정권에 거부당하면서 조선을 정복하자는 정한론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조선 정복은 어렵다는 격렬한 내부 논쟁 결과 먼저 대만을 침략하게 된다. 대만 침략 이후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와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다시 조선 침략을 꿈꾸게 되었다. 강화도에서 고의적으로 일으켰던 운요호(雲揚號) 사건은 그 발단이 되었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이 서구제국주의에서 배운 이른바 '포함외교(砲艦外交)'였다.

포함외교에 의해 체결된 1876년 2월의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 전문 12관)〉는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하여 형식적으로 전문에 일본과 조선과의 관계를 평등하게 규정했다. 그러나 그 실질적 내용에서 이 조약은 이 해 8월 조인된 〈조일수호조규부록(전문 11관)〉과 〈통상장정(전문 11칙)〉과 함께 전형적 불평등조약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우선 영사재판권에 의한 치외법권·조계인 거류지의 설정, 부산·원산·인천 등 3항구의 개항이 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 근대적 조약에 대한 인식이 없는 점을 이용해 일본은 국제법상의 조약관례를 무시하고 조약 유효기간 및 폐기조항을 고의적으로 빠뜨려 불평등조약의 무기한 존속까지 기도했다.

더구나 조선은 국내시장의 보호와 국가재정의 확보를 위하여반드시 필요한 관세권마저 잃어 버렸다. 당시 조선의 교섭당사자들은 근대적 관세권에 대한 이해가 없어 무관세의 무역을 용인하고 말았다. 이 같은 관세자주권의 상실은 밀려드는 자본제 공산품으로부터 국내산업을 보호할 수 없어 후일의 자주적 식산흥업의 추진에도 장애가 되어 민족자본을 육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화폐를 조선에서 자유로이 유통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일본의 은행지점이 조선에 진출하여 자국상인의 금융을 지원해 자본력면에서 조선상인을 압도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화폐의 유통이 가능해지면서 일본상인은 양국간의 환시세를 조작하여 수출품을 염가 매입하는 한편, 은행에서 대부받은 자금을 조선상인에게 다시 빌려주고 환차익까지 챙기기도 했다.

일본이 기도한 불평등조약체계의 수립은 특히 곡물의 수출문제에서 더욱 기만적으로 드러난다. '통상장정'의 제 6칙은 조선과 일본의 원문이 각기 다르다. 원래 제 6칙의 조선 측 조약문은 개항장에 거류하는 일본인의 식량조달을 위하여 곡물의 매입을 허가한 것이지 양국간 교역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자국의 조약문에 '개항장에 거류하는 일본인(住留日本人民)'이라는 문구를 고의적으로 제외해 곡물수출을 합법화시켰던 것이다.

아무리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시대라고는 하지만 도저히 국가간 관계에서 있을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자기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근대적 관계의 초기에서부터 저질렀던 일본이었다. 이같은 일본의 의도는 지금의 독도문제에도 연결된다. 역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의 독도 영토 주장은 자국의 이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던 100여 년 전 강화도조약의 연장에 서 있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과의 근대적 관계를 불평등조약에서 출발했고, 식민지를 거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의 관계는 그리 달리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