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훙장(李鴻章, 1823~1901)은 청대의 저명한 정치가였다. 흔히 북양대신(北洋大臣)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정식 호칭은 '의화단의 난' 사후처리를 위해 관계국과 맺은 1901년의 신축화약(辛丑和約; Boxer Protocol, 北京議定書)에 따르면 '태자태전문화전대학사 상무대신북양대신 직예총독 부당일등숙의백(太子太傳文華殿大學士商務大臣北洋大臣直隸總督部堂一等肅毅伯)'이다. 그의 공과를 둘러싼 역사적 평가는 동시대 조선의 정치가인 김옥균(1851~1894)과 마찬가지로 극명하게 갈린다.
역사적 공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리훙장
그는 오늘날의 안후이(安徽)성 성도(省都) 허페이(合肥)에서 14킬로 떨어진 곳의 췬즈(群治)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1847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2년 후 한림원(翰林院) 입학 자격을 얻었으며, 1851년 '태평천국의 난' 때에 고향을 지키기 위해 민병을 일으켜 싸워 실력자 쩡궈판(曾國藩, 1811~1872)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리훙장은 쩡궈판의 향토 의용군인 상군(湘軍)을 본뜬 회군(淮軍)을 조직해 '난'을 진압한 공적으로 쩡궈판의 뒤를 이어 직례(直隷=황허[黃河] 하류의 북부지역을 가리키는 행정구획)총독에 취임하였으며, 이 때 그가 북양대신도 겸하고 있어서 회군은 이후 '북양군벌'이라 불리게 되었다.
리훙장은 또한 1860년대 이후 양무운동의 주창자로서 강남제조국(江南製造局)이나 윤선초상국(輪船招商局), 전보국(電報局) 등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외교를 통괄하는 기관이던 총리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의 기능이 축소돼 북양대신이 점차 그것을 관할하게 되어, 이후 중대한 외교정책을 결정하거나 외국과 중요한 조규(條規)나 조약의 교섭 및 체결을 할 때에는 리훙장이 거의 도맡아 행하였다.
리훙장의 대조선외교
일본의 메이지(明治) 신정부가 만국공법에 입각한 새로운 국제관계의 수립을 조선에서 거절당한 후 청에 요구해 맺은 것이 1871년의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인데, 그 때의 청측 책임자가 바로 리훙장이었다. 이후 1875년 이른바 '강화도사건'과 그 후속 조처인 조일수호조규(1876년) 체결 당시 리훙장은 조청관계의 성격에 대해 끈질기게 묻는 일본 외교관 모리아리노리(森 有禮, 1847~1889)에게 조선은 비록 청의 속방(屬邦)이라 할지라도 일체의 정교금령(政敎禁令)에 있어 중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국이라고 단정하였다. 조일수호조규 제1관(款)에서 조선을 '자주지방(自主之邦)'으로 규정한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이는 이후 조선이 '독립국'인지 여부를 둘러싸고 일본 및 서구열강들 사이에 커다란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리훙장의 대(對)조선정책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수신사(修信使 또는 조사[朝士]) 김홍집(1842~1896)이 일본에서 가져온 황준셴(黃遵憲, 1848~1905)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인데, 조선이 취해야 할 외교정책으로 '친(親)중국, 결(結)일본, 연(聯)미국'할 것을 권한 책자였다. 리훙장이 조선에 권한 이러한 외교정책은 청의 위협세력으로 등장한 러시아와 일본, 서구세력을 견제키위한, 즉 이이제이(以夷制夷)에 의한 동북아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을 서구에 개방시킴으로써 동북아지역에서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을 꾀하는 한편, 청과 조선과의 전통적 조공책봉 관계를 이용하여 형해화(形骸化)해가는 '중화질서체제'를 재정립하려 하였던 것이다.
만국공법을 근거로 하는 서구의 조약체제에 의한 국제질서 재편압력에 전통적 패권국으로서의 권위 유지에 위협을 느낀 리훙장은 조선과의 종속(宗屬)관계를 이용하여 기존의 조공책봉체제를 보다 공고히 하려 하였다. 즉, 과거 중국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은 적이 있는 일본과는 '조규'(청일수호조규, 1871년)를 맺고, 속방인 조선과는 조규와 동격인 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1882년)을 맺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리홍장에 따르면 조규는 조정(朝廷)이 특별히 윤허하는 장정(章程)으로, 조약은 조규와 그 명칭이 다르므로 그 의미하는 바 또한 다르다는 것이다. 조약은 대등ㆍ평등한 국가 간에 맺는 것이며, 조규나 장정은 상하 관계에 있는 나라 간에맺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국 청의 속방인 조선이 서구열강과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인 조약을 맺게 되면, 조선의 종주국인 청은 자연스럽게 모든 나라의 위에 위치하게 된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188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리훙장은 조선에 서구열강과 조약을 체결토록 적극 권도(勸導)하게 되는데 '이이제이'에 의한 세력균형을 꾀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 근본 이유는 조약체제의 도전에 맞서 그것을 조공체제 내로 '편입'시켜 청 우위의 새로운 국제질서체제를 모색하려는 것이었다. 실제로 1882년 조선과 '조미조약'을 체결한 미국은 이 조약이 청에 대한 굴종외교(genuflection)라 하여 한동안 공시(公示)치 못하였으며, 실제로 이러한 청 우위의 새로운 국제질서체제(='條規體制')는 국제사회의 많은 논란 속에 청일전쟁(1894~1895)에서 청이 패함으로써 1895년 '강화(講和)조약'(=시모노세키[下關]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매국노와 외교적 영웅 사이
리훙장은 청일전쟁에서 그의 라이벌과 정적이 이끄는 군대의 협조를 받지 못하고 자신이 창설하고 이끌었던 군대만으로 전쟁을 거의 수행해야 했기에 결국 패하게 되었고, 그 후 강화를 위한 굴욕적인 담판을 하기 위해 시모노세키로 갔을 때에는 일본인 괴한의 총격으로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때 청이 지불해야 하였던 전쟁 배상금은 요즈음 화폐가치로 환산해 약 1조 294억 엔(약15조 528억 원, 당시 일본 총예산의 약 4배 정도)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챙긴 일본은 그것을 재원으로 자본주의 국가로 도약, 본격적인 제국주의·군국주의의 길로 성큼 걸어 들어가 이후 러일전쟁(1904~1905)에서의 승리와 함께 조선을 병탄한 것은 주지하는바이다.
리훙장이 서명한 각종 외국과의 조약이 불평등하고 굴욕적인 것이라 하여 오랫동안 '매국노'(漢奸)라 폄하되어 오곤 하였는데, 이 후 그와 관련된 많은 사료가 발굴되어 출간됨에 따라 외국(인)과 관계된 그의 여러 '영웅적 에피소드' 또한 적잖이 밝혀졌다고 한다. 하루는 베이징(北京)주재 독일대사가 그들이 자랑스레 여기는셰퍼드 두 마리를 리훙장에게 '조공'했었다고 한다. 이후 아무런 소식을 듣지 못한 독일대사가 리훙장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각하, 전에 우리 비스마르크 수상이 보낸 셰퍼드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은 데 대해, 리훙장이 "아! 그거 먹어보니 아주 맛이 좋더군!"하고 아주 천연덕스레 답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사람을 학살하고 희귀종인 판다를 노획해갈 뿐 아니라, 광산 채굴권이라든가 철도부설권·항만이용권 등을 닥치는 대로 빼앗아갔던 당시의 '야만적인' 서구인들에게 일침을 가하였던 리훙장의 기지를 엿볼 수 있는 일화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