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추가되었다. 그간 고구려사의 주요한 사료는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를 비롯하여 중국측 사서에 실린 관계 기사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정도였다. 7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녔음에도 고구려의 도읍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지금부터 130여 년 전 광개토태왕비가 알려지면서 부터이다. 최근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에서 광개토태왕비와 내용이 유사한 고구려시기의 비석 1기가 다시 발견되어 학계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비의 발견
『중국문물보(中國文物報)』 2013년 1월 4일자에 의하면, 비는 2012년 7월 29일 지안(集安)시 마셴(麻線)향 마셴(麻線)촌에 소재하는 마셴(馬線河)하에서 현지 주민에 의해 발견되어 현재 지안박물관(集安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지안시문물국(集安市文物局)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비석의 보호와 연구를 위한 영도소조(集安高句麗碑保護和 究領導小組)'를 구성하고 검토 작업을 벌여 이 비가 고구려 시기에 새겨진 것으로 확정하고 '지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로 명명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지안고구려비가 발견된 마셴하는 라오링(老嶺)산맥 남쪽 비탈에서 발원하여 북에서 남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유입된다. 비가 발견된 구체적인 지점은 현재 지안에서 단둥(丹東)으로 이어지는 도로(集丹公路)상에 있는 신 마셴교와 이전의 졘쟝(建疆)촌을 관통하는 구 도로상에 있는 구 마셴교 사이의 중간 지점 서쪽 강가 모래톱에서 출토되었다. 유명한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라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발견된 천추묘(千秋墓)에서 약456m, 서대묘(西大墓)에서 1149m 떨어진 곳으로 좌표는 북위41°05′46″, 동경 126°08′28″, 해발 184m이다. 마셴하 유역은 국내성(國內城) 고지에 분포되어 있는 고구려 고분군 중에서도 비교적 규모가 큰 마셴무덤군으로 강 양쪽에는 약 700~800기 정도의 적석총이 분포되어 있다.
비석의 형태
비는 현지에서 생산된 화강암으로 잔존 길이는 173cm, 너비60.6~66.5cm, 두께 12.5~21cm, 무게 464.5kg이다. 비신(碑身)의 앞면과 뒷면은 평평하게 가공되었고 아래 부분이 넓고 위가 약간 좁다. 위 부분의 오른쪽이 떨어져 나가 비의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남아있는 상태로 보아 비의 머리 부분(碑首)이 삼각형인 규형(圭形)으로 추정된다. 아래 끝 부분에는 길이 15~19.5cm, 너비 42cm, 두께 21cm의 돌출된 부분(榫頭)이 있다.
전체적인 외형이 광개토태왕비나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는데, 이들 비가 사각석주형(四角石柱形)이라면, 지안고구려비는 비수가 규형(圭形)이고 비신을 장방형 판상 형태로 다듬어 비석 아래 부분의 돌출된 부분을 좌대에 끼워 세울 수 있게 하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마도 비석이 발견된 지점을 발굴해 보면 우측 상단의 깨어진 부분과 좌대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비문의 내용과 서체(書體)
비의 앞면은 상대적으로 글자가 잘 보여 원래는 218자가 새겨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판독된 글자는 140자 정도이다. 제 1행에서 제 9행까지는 각 22자, 마지막 제 10행은 20자가 새겨져 있다. 뒷면은 일부 글자의 필획이 확인되기는 하지만 훼손이 심하여 다양한 방식을 활용한 정밀 판독이 요구된다. 공개된 판독문은 다음과 같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원왕시조추모왕지창기야(元王始祖鄒牟王之創基也)', '하백지손(河伯之孫)'이란 구절이 있는데, 이는 광개토태왕비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기술된 것으로 고구려는 추모왕 즉 주몽이 건국하였고 추모왕은 하백의 자손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수묘자(守墓者)', '연호두(烟戶頭)', '사시제사(四時祭祀)', '율교(律敎)', '매ㆍ매(賣ㆍ買)', '입비명(立碑銘)' 같은 표현이 있는데, 수묘인들의 역할로서 무덤에 제사를 지내는 등 수묘와 관련된 법령을 규정하여 비석에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비문 중 출현하는 '사시제사(四時祭祀)', '연호두(烟戶頭)' 등의 글자는 광개토태왕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고구려 사료 중에서도 기록된 적 없는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고구려 상장제도와 수묘제도 등의 연구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내용들이다.
아직 실물을 보지 못해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탁본에 나타난 글자의 서체(書體)는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예서체로 보인다.
고구려의 독특한 서체인 '광개토태왕비체(廣開土太王碑體)'와 닮은 듯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한대(漢代)의 예서체와도 유사한 면이 있어 고구려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서체를 어느 정도수용하면서도 독자성을 발휘했음을 보여주는 실물자료이다.
서거 1600주기에 광개토태왕이 보내준 지안고구려비의 의미
새로 발견된 지안고구려비는 광개토태왕비, 충주고구려비 등과 함께 고구려 역사문화 연구에 귀중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광개토태왕비에 나와 있는 수묘제도의 시행, 수묘제도의 성격, 수묘의 구체적인 방식, 연호와 연호두의 관계 등 고구려 정치, 경제, 사회사를 새롭게 규명하는 것은 물론이고 비석의 형태, 서체 등을 통해 고구려 서체의 변화발전 과정, 문자의 활용, 한·중 간 서사문화(書寫文化)의 교류 양상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된다.
이미 『중국문물보』에 공개된 만큼, 조만간 정식 보고서가 출간될 것으로 예상된다. 보고서가 입수되는 대로 재단을 비롯하여 학계전문가들이 모여 학술적인 검토 작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 또 한편으로는 중국측과 남ㆍ북한, 중국, 일본, 대만 등 각국의 연구자들이 함께 글자를 판독하고 연구하는 모임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서거 1600주기가 되는 해에 광개토태왕이 특별히 보내준 지안고구려비를 통해 한ㆍ중 간에 학술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