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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동아시아 역사대화, 비대칭의 곤경을 넘어
  • 유용태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중국근현대사학회 회장

"엇비슷한 국가들로 구성된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의 역사대화란 그 주체들 간에 현격한 비대칭이 존재하고 있어 지난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의 역내 교류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음에도 역사인식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그 핵심은 이웃나라를 향해 가해진 자국의 국가폭력을 스스로 성찰하는 자성사관과 이를 부정하는 자만사관 사이의 갈등이다. 이는 흔히 자국사의 영광을 위하여 이웃나라 역사의 자주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역사대화란 이러한 역사인식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대화다. 이것은 유럽에서 나치 독일의 침략 문제를 의제로 삼아 처음 시도되었고 성과를 거두어 유럽연합 탄생의 걸림돌 하나를 제거해주었다. 그것이 동아시아에서는 거의 반세기 정도 늦은 2000년대 들어와 시도되었다.

대화의 채널은 우선 민간부문에서 열렸다. 한국 역사교과서연구회와 일본 역사교육연구회의 대화(1997-2006), 한국 전국역사교사모임과 일본 역사교육자협의회의 대화(2001-2006),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2001-2012) 등이 대표적이다. 동북아역사재단과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수년전부터 민간 차원의 대화를 조직하거나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정부차원의 공식 채널로는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2002-2005)와 중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2006-2009)가 있다. 그 결과는 각종 공동교재와 보고서로 나와 있다.

이상의 대화 노력들은 이제 시작단계일 뿐이다. 특히 한중 양국간에는 정부와 민간 어느쪽에도 위 사례에 상응하는 채널조차 마련되지 않고 있다. 그렇더라도 단기간의 역사대화로 거둔 성과는 적지 않으며 그 의미 또한 소중하다. 특히 민간대화의 성과가 더욱 크다. 우리는 이를 디딤돌로 삼아 차근차근 전진해야 한다. 엇비슷한 국가들로 구성된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의 역사대화란 그 주체들 간에 현격한 비대칭이 존재하고 있어 지난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정부차원의 대화에서 주목되는 성과는 한국고대사의 자주성을 부정해온 '임나일본부설'이 한일공동연구위원회에 의해 부정된 것이다. 이는 분명 제국일본이 만들어낸 한일고대사 인식의 큰 기둥 하나를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단기의 대화로 좁힐 수 있는 인식 차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 기둥을 설계한 인식체계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성과는 만주사변(1931) 이후 일본의 침략전쟁 사실이 중일역사공동위원회에서 인정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과 중국은 청일/러일전쟁까지 침략전쟁 범위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어 차이가 크지만 이는 현재 일본학계의 역사인식의 도달점을 보여준다. 후소샤/지유샤 교과서 및 이를 지지하는 우익세력들은 그것조차 부인하고 있다.

역사대화의 진전을 위해서는 정치적 리더십도 역사연구 못지않게 중요하다. 무라야마 담화(1995)는 일본의 "식민지지배와 침략"을 인정하고 이를 "국책의 잘못"으로 명시해 "반성과 사죄"를 표하였다는 점에서 자성의 최고수준으로 평가된다. 여기서 침략과 지배의 범위를 명시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만주사변 이후만을 지칭할 것이다. 이는 일본의 모든 교과서에서 청일/러일전쟁으로 대만과 조선을 식민지화함으로써 구미열강과 같은 문명제국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서술하는 것과 대조된다. 왜 이처럼 일본의 학계도 총리담화도 메이지시기의 팽창은 문명화이되 쇼와시기의 팽창은 침략이라는 분절되고 편의적인 역사인식을 보이는 걸까? 미조구치 유우조(溝口雄三) 도쿄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근대일본은 자신을 선진 구미와 비교하는 동시에 후진 중국·조선과 비교하여 만족감을 얻으면서 중국·조선을 문명화시킨다는 전제 하에 국가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실제로 이를 실현한 약진의 전기인 청일/러일전쟁을 침략이라 인정하는 순간 일본 근대사 자체가 통째로 부정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국사관에 의거한 자국사의 서사구조와 인식체계의 정수를 꿰뚫어 본 성찰이다. 그럼에도 만주사변 이후의 침략을 인정하는 까닭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사실 도쿄재판(1946∼48)에서 원래 미국은 일본의 전쟁책임 범위를 진주만 공격(1941) 이후로 한정하였으나, 1946년 1월 중화민국 정부가 만주사변 이후로 소급해야 한다고 요구함으로써 수정되었다. 그러니까 일본의 학계와 정치지도자가 인정하는 반성과 사죄의 범위는 바로 이 도쿄재판의 틀에 갇혀 있는 셈이다. 중화민국은 미국과 함께 그 틀을 정해준 주체의 하나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런데, 당시 중화민국 정부는 대일점령을 공동으로 수행하기 위해 5만명의 군대를 파병해달라는 미국의 요청을 받고서는 소련에게 파병구실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포기하였다. 중화민국은 미·영·소와 함께 유엔헌장을 기초한 4대국의 하나이자 유엔 대일관제위원회(對日管制委員會)의 일원으로서 일본 군국주의를 청산할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었지만 반공을 위해 스스로 방기한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72년 일본과 수교하면서 상대국의 전쟁책임 문제를 그냥 덮어두었다가 항전승리 50주년인 1995년 처음으로 일본 정부와 기업에게 배상·보상과 사죄를 요구하였다. 무라야마 담화가 나온 것은 바로 그 때이다.

그러나 담화는 대화와 다른 일방적 발표여서 상대에게 진의를 전달하기 어렵다. 한 각료는 그 안에 '언제 어느 나라를' 이라고 명기하지 않았으니 좋지 않으냐는 반응까지 보였다. 반면 영국에게는 총리가 직접 '친서'를 보내 사죄하였으니 현격한 대조다. 그래서 미조구치는 총리 담화가 일본국민을 향해 '우리는 또 다시 사죄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국내용일 뿐이라면서, 그 이면에는 일본의 패전은 미·영에 대한 것이지 중국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전쟁인식이 깔려있다고 본다. 이와 달리 중국의 근대사 서사구조는 항일전쟁의 승리 스토리로 짜여져 있다. 승자는 있으나 패자는 없다. 만일 당시 중국이 군대를 파병하여 미국과 함께 대일점령정책을 수행했어도 이런 인식이 가능했을까?

G2 대국으로 돌아온 중국이 이런 전사를 돌아보면서 동아시아 역사대화의 한 주체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이 막중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 안에서 자국의 중화사관을 직시하고 상대화하는 학술적 노력이 허용되어 중국의 미조구치들이 나타나야 한다. 중화사관은 천하 유일의 황제국을 전제하고 역사상의 이웃나라를 기미주나 지방정권으로 간주하는 역사인식의 체계를 당연시한다. 하지만 이는 신성불가침의 황국의 존재를 전제하고 이웃나라를 지배하는것을 당연시한 황국사관과 얼마만큼 다른가? 하나가 흥하면 다른 하나가 쇠하면서 이웃나라, 특히 한국사의 자주성을 왜곡하고 훼손한 점에서는 닮은꼴이다. 한편 유일 절대의 중심을 자처한 중국/일본과 그 주변과의 관계에서 보면 거대한 비대칭이다.

바야흐로 이 비대칭의 곤경을 넘어설 전기가 마련되고 있다. 지난 100여년간 지속돼온 역사인식의 거대한 체계가 동요와 균열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중국의 부상을 19세기 중엽 '서구의 충격'에 비견되는 '중국의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충격은 필시 황국사관에 의거한 일본판 동양사의 인식체계를 허무는 데에도 작동할 것이다. 그 대신 중화사관에 의거한 중국판 동양사가 등장할 것인지 아니면 평화와 공존의 동아시아 지역사가 새롭게 쓰여질 것인지 갈림길에 우리는 서 있다. 동아시아사를 교과목으로 신설해 실험중인 한국 역사학계가 중화의 논리와 황국의 논리 사이에서 균형자 구실을 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