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연령 76세의 할아버지들이 배낭여행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를 불러일으킨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 이 프로그램이 널리 알려지면서 한국의 '할배'들이 다녀온 곳도 덩달아 주목받고 있는데, 그 중 한 곳이 바로 프랑스의 스트라스부흐(Strasbourg)이다. 프랑스 알자스주에 위치한 이 도시는 웅장한 대성당과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경이 된 '쁘띠 프랑스(petit France, 작은 프랑스)'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스트라스부흐라는 독일스러운 이름에서도 느껴지듯 독일과 프랑스 간의 극심한 분쟁지역이었다. 이 도시는 무려 17번이나 통치권이 바뀐 역사를 가진 프랑스의 '검은 얼룩'이었다. 스트라스부흐를 비롯한 알자스-로렌 지역이 왜 땅주인이 여러 차례 바뀐 '검은 얼룩'이 되었는지 1870년 보불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자.
Q : 보불(普佛)전쟁은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발발 배경과 경과, 그리고 결과는?
잘 알려진 대로 보불전쟁은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우선 시대적인 맥락을 보면, 당시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의 주도로 독일을 통일하려 했던 반면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이러한 독일의 통일을 저지하려는 가운데, 에스파니아 국왕 선출문제를 둘러싼 양국 간의 분쟁이 격화되었고, 결국 1870년 7월 19일에 프랑스가 선전포고함으로써 이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남·북부 독일 연방제국의 지지를 얻은 프로이센 독일군은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갖춘 가운데, 프랑스로 진격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9월 2일 독일군에 항복하였으나, 독일군은 전쟁을 계속하여 파리를 포위한 뒤, 스트라스부흐(9월 말)와 메츠(10월 말) 등을 차례로 점령하였고, 결국 1871년 1월 28일 파리의 성문은 열리고 말았다. 전쟁 후 프랑스와 독일은 베르사이유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2월), 이어서 5월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패전국 프랑스는 독일에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하고, 알자스-로렌 지방은 독일에 편입되었다. 한편, 파리의 성문이 열리기 전, 1월 18일에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의 성립이 선포되었다. 프랑스로서는 최고의 국가적 치욕을 경험한 것이었다.
Q :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전쟁의 패인을 어디에 두었는가? 그리고 프랑스가 가장 시급하게 취했던 대응책은 무엇이었는가?
프랑스는 보불전쟁에서 패하고 평화를 구걸해야만 했다. 그렇게 당당하고 자존심 강했던 프랑스인들이 전쟁에서 패함에 따라 그들의 국가적 자존심은 땅에 떨어졌다. 프랑스 당국은 그들의 국민적 사기와 통합을 끌어내기 위한 방안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그들의 군대 장교들을 대상으로 패인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결국 그들의 군대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컨대, 당시 프랑스 장교들은 상대방 국가에 관하여 너무나도 무지하였으며, 대축척(大縮尺) 지도를 쓰는 것조차 몰랐다. 심지어, 어떤 장교들은 전장에서 지도읽기를 배우기보다는 까막눈으로 진격하는 것이 더 낫다면서 지도를 뿌리치기도 하였다. 더욱이, 프랑스에서 국가지도를 제작하고 관장하던 지리학자들의 모임이 보불전쟁 40년 전인 1831년에 폐지되었던 관계로, 독일군이 파리 근교까지 진격해왔을 때에도 프랑스 군대는 그 지역을 파악할 수 있는 대축척지도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프랑스의 교육부와 언론은 다음과 같이 입을 모았다. 즉, "우리를 패배시킨 것은 독일의 초등학교 교사이다." 이 말의 뜻은 당시,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시기부터 학교에서 지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쳤는데, 프랑스에서는 역사 위주의 수업이 이루어지고 지리는 거의 가르치지 않았던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프랑스의 장교들은 학교에서 지리와 지도읽기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결론이 도출된 이후, 프랑스에서는 교육부 장관의 지시로 전국 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는 지리교육의 현황을 즉시 파악하게 하였다. 당시 학교교육에 관한 보고서에 의하면, 학교에서는 지리를 전공한 교사도 없었고, 지리를 가르치지도 않았다. 다만, 역사를 가르치면서 필요한 경우 역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부 지도를 활용하는게 전부였다. 결국, 이때부터 교육부의 지시로 프랑스 대학에서는 지리교원을 양성하기 위한 학과가 설치되고, 학교에서는 역사를 가르치던 시간의 절반을 할애해서 지리를 가르치도록 조치했다. 그 결과, 이 때부터 교과목의 이름은 <역사·지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당시에 그려진 '검은 얼룩 (la tache noire, 라 따슈 누아흐)'이란 그림을 보면, 독일에 빼앗긴 지역을 검은 색으로 표시한 지도를 수업시간에 살펴보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전쟁에서 패배한 국민들의 조국애와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들의 진지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편, 보불전쟁 직후 착공하여 1919년에 완공한 사크레 꾀흐(Sacré-Coeur) 성당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몽마르뜨(Montmartre) 언덕위에 있는 이 성당은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인들이 당시 그들의 영적, 도덕적 타락을 속죄하기 위해, 그리고 전쟁에 패하고 사기가 땅에 떨어진 프랑스 국민들의 대통합을 염원하는 바람을 담아서 건축하였다.
Q :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빼앗겼던 알자스-로렌 지역은 어떤 곳이며, 이 지역은 언제 어떻게 프랑스에 반환되었는가 ?
알자스-로렌 지역(Alsace-Lorraine)은 역사적으로 독일과 프랑스간의 분쟁지역으로서 그 영유권이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뒤바뀌었다. 예컨대, 서기 921년 이래로, 이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에 포함되었으나, 베스트팔렌 조약(1648년)에 의해 프랑스령이 되었다. 그 후, 보불전쟁(1870)에서 프랑스가 패함에 따라 이지역은 다시 독일제국에 편입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함에 따라(1918년 11월), 이 지역은 일시적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얻었지만, 베르사이유 조약(1919,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과 패전국 독일 간에 맺은 강화조약)으로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그 후, 1940년, 이 지역은 독일의 나치에 의해 다시 합병되었으나,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이 지역은 다시 프랑스령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Q : 오늘날 우리나라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 등 국가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우리가 취하고 있는 대응방식은 무엇이며, 프랑스의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무엇이겠는가?
몇 년 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문제에 직면했을 때, 역사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대되었다. 그래서 사회과에 포함되어 있던 역사과의 비중이 커지고, 역사는 독립교과가 되었다. 교육과정에는 동아시아사 내용도 새롭게 추가되었다. 한편,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역사의 비중을 더욱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크다. 주변국과의 역사인식 문제와 영토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역사교육만을 강화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 교육과 교과목 간의 관계는 우리 몸의 영양소와 건강의 문제에 비유할 수 있다. 어느 한 가지 영양소만을 과도하게 섭취한다고 해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영양소를 고르게 섭취하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섭취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다를 것이다. 따라서 독도가 단순히 예전부터 우리영토였다라는 역사적 증거 찾기로만 당위성을 부여하기 보다는 실체로서의 독도를 지리적이고 공간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접근한다면 훨씬 더 생생하고 마음에 와 닿는 공간감과 영토의식을 갖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학교교육은 대입시험만 끝나면 10년 이상 배운 학습 내용을 금새 잊어버리는 시험대비용 교육의 성격이 짙다. 우리의 역사인식과 영토문제 또한 시험을 염두에 두고 특정한 개념과 지식을 획득하게 하는 것은 학생들이 그러한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우리와 관련된 영토 문제는 역사교육과 지리교육을 동시에 강화하여 학생들에게 영토를 역사적, 공간적인 시각에서 종합적으로 바라보게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