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전쟁(1950∼1953)으로 인한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동북아역사재단과 고려대학교는 7월 27일 한국휴전협정 60년을 되새기는 국제학술회의를 공동으로 주최했다. 회의에 발표자로 초청된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제임스 매트레이 교수는 "아이젠하워와 한국 : 계속되는 논점"이라는 제목으로 특별강연을 했다. 재단 홍보교육실 설원태 수석행정원이 이 행사를 전후해 매트레이 교수와 직접 만났고 이후 이메일을 통해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_ 편집자 주
설원태 재단 수석행정원
서울대 사대 영어교육과 학사, 동 석사과정 수료,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 주립대 저널리즘 석사, 경희대 신문방송학 박사를 받았다. 중등학교 영어교사, KBS 기자, 세계일보 기자, 경향신문 기자(온라인 영문편집위원) 등을 거쳐 2012년 3월부터 재단의 홍보교육실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영문 저서「Presidential Communication and News Media」(2005)를 비롯해 국문 편·저서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2007), 연구서「글로벌 언론인교류 및 네트워크 구축방안」(2011) 등 저서·연구서를 갖고 있다.
제임스 I. 매트레이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치코) 교수
제임스 매트레이(James I. Matray) 교수는 레이크 포레스트 대학교에서 학사, 버지니아 주립대에서 미국사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2년부터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마지못해 수행한 십자군 성전(聖戰) : 한국에 대한 미국의 대외정책, 1941∼1950」(1985), 「한국과 냉전 : 분단, 파괴와 군축」(공편, 1993), 「분단된 한국:38선과 비무장지대」(2005)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한국의 분할 : 소련과 미국의 통일 추진, 1945∼1948」(1998), 「엇갈리는 메시지: 개성에서의 한국정전협상」(2012) 등이 있다. 그는 또한 「한국인들이 미국을 세계적 불량배라고 생각하는 이유」(2004) 등 흥미있는 에세이를 썼다. 그는 현재 「1950∼1953년 사이 한국에 대한 미국의 대외정책과 개입의 대가」 등 몇 가지 주제들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재단의 자문위원이다.
Q 설원태 올해가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 7월 27일 고려대학교에서 한국전쟁 및 휴전에 관한 발표도 하셨는데 "60년간의 한국전 휴전"을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까? 정전이 이렇게 오래 지속된 이유가 무엇이며, 정전 구도가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보시는지요?
A 매트레이 한반도가 평화체제 대신 정전체제 속에서 60년을 보냈다는 것은 한국인들이 20세기가 남긴 유산 중 국민으로서 두 번째의 큰 비극을 계속 감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비극은 35년간의 일제강점이었고, 두 번째는 한반도의 분단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한 세대 전에 종식된 냉전의 걸림돌을 아직 짊어지고 있으며, 이런 나라는 한국이 유일합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 당시 인위적으로 분단되면서 3년간 나라를 전쟁의 잔인함으로 몰아넣었지만,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정전이 60년간 지속된 이유는 자국이 나아갈 미래의 방향에 대해 (남북한의) 한국인들간의 의견 충돌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금세기에 들어 자립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는 북한이라는 실패한 체제는 처음에는 구소련, 현재는 중국과 같은 주변 강대국이 지속적으로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에 존재해 왔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북한이 공산주의 체제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증진시키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여기는 동안은 휴전이 유지될 것이고 한국의 분단은 지속될 것입니다.
Q 설원태 기나긴 한국의 정전 체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겠습니까?
A 매트레이 정전을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로 대체하는 것보다는 북한 정권의 붕괴가 지속적인 교착상태를 해결할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일 겁니다. 만약 북한이 생존을 계속한다면 한국전쟁을 진정으로 종결할 유일한 차선책은 외교와 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한국은 북한에 경제적 원조를 제공하고 합작 투자를 촉진하는 등 '햇볕정책'을 재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이 더 많은 민간 기업을 받아들일수록 한국의 지배하에 이루어지는 통일을 받아들이려는 대중적 지지를 형성함으로써 김정은 정권이 주민들을 상대로 한 독재적 지배력이 약화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미국이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을 채택해 북한 정권을 공식인정하고 경제적, 외교적 제재를 끝내고 정전협정을 대체할 공식 평화조약에 서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대립정책은 정전협정 체제 및 한국의 분단만을 무기한 영속시킬 수 있습니다.
Q 설원태 오늘날의 한·미 군사동맹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A 매트레이 오늘날 한국과 미국 간의 군사동맹은 한국전쟁의 정전 이래 가장 공고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기까지 가장 크게 기여한 요인은 한국이 번성하는 민주 국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1970년대에 경제력을 강화함으로써 더 이상 미국에게 의지하지 않게 됐기 때문에 오늘날 강력한 한미 협력관계의 기초를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동안 미국의 지도자들은 한국 사람들의 정치적 자유가 지속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는데 대해 불만족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민주주의적 권리를 찾은 1990년대 초에는 한미 동맹이 튼튼해졌다가, 조지 W 부시 대통령 집권기 동안 북한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놓고 전개된 한반도 위기, 그리고 당시 한국의 햇볕정책을 둘러싼 한미 갈등으로 인해 2001년 이래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2007년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으로 한국의 정책은 핵개발 계획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북한을 포용하려는 미국의 정책과 동일선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결과 미국과 한국은 오늘날 동일한 대북정책을 공유하게 됐고, 21세기에 들어와 그동안 동맹 속에 존재했던 극심한 마찰은 사라졌습니다. 2013년의 한미 동맹은 그 어느 때보다 공고하고, 이는 현재의 박근혜와 오바마 정권 아래에서도 유지돼야 합니다.
Q 설원태 교수님은 한국이 1950년 북한의 남침 공격을 '유도'했다는 브루스 커밍스의 이론을 비판한 장본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커밍스 이론의 약점은 어떻게 밝히셨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한국전쟁에 관한 본인의 이론은 무엇입니까?
A 매트레이 앞부분에 하신 말씀은 과장된 것입니다. 저는 저의 첫 저서 『마지못해 수행한 십자군 성전 : 한국에 대한 미국의 대외정책(The Reluctant Crusade : U.S.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1985)을 통해 한국이 북한을 먼저 공격했다는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저는 북한의 침공 규모와 속도를 감안해 북한이 먼저 한국 공격을 개시했다는 많은 학자들의 기존 결론과 주장을 지지하고 반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에서 1950년 6월 재래식 전쟁이 발발할 만한 여건, 특히 한반도의 분단 여건을 조성한 미국과 소련의 국제적 개입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북한은 한국전을 '예방전(豫防戰, preventive war)'이라고 주장했는데, 저는 저의 책을 통해 북한이 왜 먼저 한국을 공격했는지 설명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증가시키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미국이 소련보다 더 많은 자원을 보유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이 북한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고, 그에 따라 북한이 한국에 흡수(통일)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제 책은 1985년에 출간됐습니다. 따라서 브루스 커밍스의 이론들이 무너진 것은 제 책의 출간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냉전붕괴 후 소련의 비밀문서들이 공개됐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공개된 문서들은 요시프 스탈린이 북한의 남한 침공을 계획하고 시행하는데 직접 관여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들 문서는 동시에 이 모든 것이 김일성의 안에서 비롯됐고 김일성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또한 드러내고 있습니다. 공개된 러시아의 그 문서들은 김일성이 경제적으로 강력하고 정치적으로 단결되어 국가통일을 이룩할 만한 남한의 부상을 두려워해 한국전쟁을 먼저 시작했다는 제 이론을 확실한 증거로서 뒷받침해 줍니다. 실제로 당시 김일성의 침공 계획은 '선제공격작전(Operation Pre-emptive Strike)'이라고 명명됐습니다. 한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지난 두 세대를 거쳐 크게 발전해 온 것을 보면, 김일성의 예견 및 우려는 현실로 증명된 셈입니다.
Q 설원태 동아시아의 정치지형 속에서 60년 전과 현재 사이의 정치적 상황의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A 매트레이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60년간 동아시아의 정치적 상황에는 극적인 변화들이 발생했습니다. 한반도를 보면, 북한은 초반에는 남한보다 훨씬 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튼튼하고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1970년부터는 남한이 전쟁에서 회복한 것을 넘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대한민국 정부가 정치적 독재를 민주주의로 대체시켰습니다. 이에 비해 북한은 주민들을 비양심적인 착취와 고통으로 몰아넣는 비뚤어진 정치체제를 가진 경제적 빈곤국이 됐습니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여전히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그 권위에 대해서는 이전보다 더 큰 도전들과 맞서고 있습니다. 우선, 한국은 자신들의 외교정책결정을 훨씬 더 독자적으로 내리게 됐습니다. 둘째, 일본은 한동안 동북아의 주요 경제강국이었지만 지난 20년 사이 경기침체를 겪으면서 영향력을 발휘하던 위치를 잃어버렸습니다. 가장 중요한 세 번째는 중국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우세한 존재로 부상했습니다. 한국 전쟁 이후 20년간 미국은 중국을 고립시키려 노력하다가 소련을 견제할 하위 동맹국으로 삼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했습니다. 소련이 사라진 지금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외부세력으로 부상해 미국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동북아의 전략적 상황은 60년 전과 완전히달라졌고, 더 예측 불가능해졌습니다.
Q 설원태 교수님이 집필하신 여러 논문 및 글 중에는 『Why South Koreans Think of the United States as a Global Bully?』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에세이가 있었습니다. 왜 미국의 이미지가 일부 한국인들에게 부정적·비판적으로 비쳐졌다고 생각하십니까?
A 매트레이 그 글은 약 10년 전 조지 W. 부시 정권 때 한미 관계의 악화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쓴 것입니다.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 중에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이 한국 통일을 가로막고 북한을 도발한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은 부시 정부가 반대했던 햇볕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정당한 이유 없이 이라크와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2005년경에는 한국에서 반미주의가 최고조에 달했다가 그 이후로는 거의 소멸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설원태 교수님의 이력서를 보면, 원래 전공분야는 미국사였습니다. 미국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셨는데 이것이 어떻게 한반도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됐습니까?
A 매트레이 1969년 여름 저는 레이크 포레스트 대학교에서 3학년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동네 소풍을 갔는데 이곳에서 당시 흔히 일어나던 베트남 전쟁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하자 제 가족과 친분이 깊은 한 분이 공산주의를 막고자 하는 미국의 군사적 움직임이 옳다면서 이 점에서는 "한국전쟁과 똑같다"고 외쳤습니다. 당시 한국전쟁에 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던 저는 그 친구의 발언에 대꾸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해 가을 저의 무식함을 보충하기 위해 교수님 중 한 분께 한국전쟁에 관한 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교수님께서 추천해 주신 책은 I.F. 스톤(Isidor Feinstein Stone)의 『한국전쟁의 숨겨진 역사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였습니다. 이 책은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미국의 군사 개입을 유도하기 위해 북한을 도발했다는 '음모론'을 뒷받침하는 유명한 수정주의(修正主義)적 해석이 담고 있었습니다. 6년 후 저는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찾고 있던 중 한국전쟁이 떠올랐습니다. 처음에는 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 사이를 연구할 계획이었는데 미국 정부문서들이 기밀로 분류돼 있어서 조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기록 보관소에 보관된 전쟁 이전의 기록물들은 열람이 가능했고 1950년에 나온 기록들의 기밀분류가 곧해제될 예정이었습니다. 1977년에 논문 집필을 마쳤고, 여러차례 수정을 거쳐 『마지못해 수행한 십자군 성전(聖戰) : 한국에 대한 미국의 대외정책, 1941∼1950』이 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습니다.
Q 설원태 정전 60년이었던 지난 7월 27일 저는 미국의 CNN이 평양 현지발로 평양 주민들이 한국전쟁의 승리자는 북한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방송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해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북한이 한국전쟁의 승리자라고 주장할 수 있나요? 한국전쟁에서 어느 쪽이 '이겼다'고 생각하시는지, 또한 북한 사람들은 왜 그들이 한국전쟁에서 이겼다고 주장하는지요?
A 매트레이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한국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믿는 것은 당연합니다. 북한은 늘 "남한이 먼저 공격했고, 자신들의 반격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러한 추정에 의거해 보면, 북한은 자신들을 정복하려 했던 한국의 시도를 좌절시켰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북한을 정복하기 위해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이는 38선 돌파로 이어졌습니다. 북한은 중국의 군사개입에 대한 언급 없이 미군을 물리치고 북한에서 몰아낸 업적, 즉 또 하나의 승리를 온전한 자신들의 업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통일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쪽도 한국전쟁에서 "이겼다"거나 "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Q 설원태 약력을 보면, 교수님은 젊은 시절 주방위군(National Guard)으로 복무하신 바 있습니다. 한국에서 군대근무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미국에서 주방위군과 미군 병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A 매트레이 저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피하려고 1970년 2월 주방위군에 입대했습니다. 그 얼마 전인 12월에 제 생일이 징집 추첨에서 낮은 번호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미군으로 강제 입대되는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 당시 린든 존슨 정권은 미국 예비군이나 주방위군은 베트남 전쟁에 동원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이들 군부대는 미국에 남겨뒀습니다. 존슨정부는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가 더 심해질 것을 우려해 주방위 부대는 전혀 베트남에 파병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시에는 주방위 부대를 보냈으나 베트남전 당시에는 다른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미국정부는 1972년부터 더 이상 징집을 하지않고 전원 자원입대로 군인을 모집해 왔습니다. 이는 미국정부가 가장 최근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발생한 전투에 주방위부대를 동원해야 했다는 뜻입니다. 미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전 및 이라크전에 주방위부대를 파병함으로써 미국민의 지지도를 높였습니다. 이것은 베트남 전쟁 때의 우려와는 정반대 현상입니다.
Q 설원태 앞으로의 연구계획을 말씀해 주십시오.
A 매트레이 저는 지난 20년간 저는 한국의 반미주의와 북핵 위기를 연구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바쳤습니다. 올해는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Studies에 조지 W. 부시 정권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 외교관계 전문가로 남을 겁니다. 저는 현재 '포크 촙 힐 전투(Battles of Pork Chop Hill)'를 연구하고 있는데, 그 결과물은 조만간 인디애나 대학교 출판부를 통해 책으로 출간될 것입니다. (매트레이 교수는 '포크 촙 힐'이 연천 북방에 위치한 '255고지'라고 설명했다. 교수에 의하면, 이곳은 한국지명으로는 별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군들은 1953년 4월 및 7월에 걸쳐 공산측을 상대로 두 차례의 대규모 전투를 벌였고, 최종적으로 공산측이 이 고지의 통제권을 가져갔다. 미군들은 이 고지가 돼지고기토막(pork chop)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