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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베트남 독립운동가 판 보이 쩌우(Phan BÐội Châu, 1867~1940)의 생애
  • 윤대영 서강대 동아연구소 HK교수
1940년 이전 생존시의 판 보이 쩌우

베트남 식민지화가 남부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1867년 말에 중부 응에 안(Nghệ An) 성(省)의 남 단(Nam Đàn) 현(縣)에서 태어난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는 다섯 살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자국이 완전히 식민지로 전락한 직후인 1885년에 대불 저항 세력을 조직하여 근왕운동(勤王運動)에 참여하기도 했고, 이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관리가 되고자 본격적으로 과거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 향시에 합격한 이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1897년 상경한 판 보이 쩌우는 당 응우옌 껀(Đặng Nguyên Cẩn)이나 응우옌 트엉 히엔(Nguyễn Thượng Hiền) 등과 같은 관리들과 우의를 다지며 결속할 수 있었다. 응우옌 트엉 히엔은 그에게 개혁가 응우옌로 짜익(Nguyễn Lộ Trạch)의 저작들, 특히 『Thiên hạ đại thế luận』(천하대세론[天下大勢論])을 소개해 주었는데, 이 논설을 계기로 판 보이 쩌우는 개혁사상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가 응우옌 트엉 히엔에게 빌려 읽은 중국 개혁가들의 서적들 중에는 서계여(徐繼畬)의 『영환지략(瀛環志略)』, 왕도(王韜)의 『보법전기(普法戰記)』, 미국인 교사 알렌(Young J. Allen)과 채이강(蔡爾康)의 『중동전기본말(中東戰紀本末)』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지적 교류와 '신서(新書)' 강독 덕택으로 1897년은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었다. 또한 바로 이 시점부터 그는 피식민 국가들의 참사는 식민 국가들이 마음대로 조정하는 적대적인 세계 관계에 의해 조장되었다고 판단하고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1905년초 판 보이 쩌우는 반식민운동(反植民運動)의 재원을 마련하고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그에게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새로운 정책에 의해 서구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중국과 러시아와의 대결에서까지 승리를 거둔 아시아의 성공 사례로 인식되고 있었다. 판 보이 쩌우는 '출양(出洋)'을 개시하기 전까지 외국인들과 접촉한 경험이 전혀 없었는데, 베트남인들만의 단결로는 '대의(大義)'를 달성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판단하여 중국인들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협력을 통해 자국의 독립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1905년 4월 일본에 도착한 판 보이 쩌우는 도일(渡日) 이전부터 『무술정변기(戊戌政變記)』,『중국혼(中國魂)』, 『신민총보(新民叢報)』 등을 통해 일찍이 알고 있던 중국의 개혁운동가 양계초(梁啓超)를 만나기 위해 요코하마로 갔다. 양계초는 베트남의 독립 문제에 관해 조언을 구한 그에게 일단 일본이 군사 개입을 하게 되면 결코 물러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중요한 것은 베트남인들 스스로 내적인 힘을 기르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판 보이 쩌우가 받은 또 하나의 중요한 권고는 "글을 많이 써서 프랑스의 혹독한 식민 정책 아래 베트남이 처한 곤경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 이 권고에 따라 상해 광지서국(廣智書局)에서 1905년 9월에 출판된 책이 바로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Việt Nam Vong Quốc Sử)였다. 아울러, 양계초는 판 보이 쩌우에게 국민들의 의식을 일깨우며 이들의 전반적인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해 베트남 젊은이들의 외국 유학을 권유했다. 이러한 취지에서 양계초는 일본 정계의 인사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와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 간사 카시와바라 분타로(柏栢文太郞) 등을 소개해 주었다. 이어서, 이누카이는 육군참모장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安正)와 동아동문회 지도자 네즈 하지메(根津一)와의 만남도 주선했다. 이들 모두 역시 인재 양성이 급선무임을 말하고 유학생을 보내면 받아주겠다고 제안하게 되었다.

판 보이 쩌우가 프랑스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된 뒤
연금 생활을 하던 후에(Hue)의 한 거주지

특히, '아시아 연대'를 지향하고 있던 동아동문회와 판 보이 쩌우의 만남은 베트남 지식인들의 '출양'에 큰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중국, 한국, 태국, 인도 등지의 유학생들을 후원하고 있던 동아동문회가 베트남 학생들의 동문서원(同文書院) 입학을 결정하면서 베트남 청년들의 일본 방문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동아동문회의 협력으로 형성된 베트남의 '동유(東遊)' 풍조는 베트남 지식인들과 주변 동아시아 지식인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베트남 개혁운동가들의 인적 네트워크는 중국 및 일본 혁명파 그룹으로도 확대되어 판 보이 쩌우를 포함한 베트남 독립운동가들과 각국 혁명당인(革命黨人)들 사이에 결성된 동아동맹회(東亞同盟會)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판 보이 쩌우와 동아시아 각국 지식인들간의 연대는 1907년 6월의 불일조약(佛日條約) 체결로 난국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 조약에는 두 나라가 아시아 대륙에서 상대방의 입장과 영토권을 존중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프랑스 당국의 의사를 받아들인 일본은 재일(在日) 베트남인 조직을 해산시키기 시작했다. 1909년이 되면서 대부분의 베트남 인사들이 자국으로 돌아오거나 해상 교통이편리하고 프랑스의 감시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홍콩으로 망명했다. 그 해에 일본에서 추방된 판 보이 쩌우도 홍콩을 경유하여 태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판 보이 쩌우는 100여명의 동지들과 광주(廣州)에 결집하고 1912년 초에 민주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월남광복회를 창설했다. 그리고 월남광복회가 새롭게 정비되는 과정에서 그와 중국 혁명파의 연계 활동이 재개되었다. 그리고 반식민운동을 보다 광범위하게 전개하기 위해 모든 식민지 아시아 지식인들의 대동단결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판 보이 쩌우는 연대 조직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14년 중국 남부의 군벌에 의해 투옥된 판 보이 쩌우는 동지들을 통해 비밀리에 독일 측의 지원을 얻어 반불항쟁을 전개했고, 1917년 출감된 이후에는 중국과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별다른 큰 성과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1921년부터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소련 측의 인사들과도 접촉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5년 상해를 방문하던 중 프랑스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하노이로 송환된 판 보이 쩌우는 사형언도를 받았다가 베트남인들의 거센 저항에 힘입어 죽음을 면하고 후에(Huế)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1940년에 생을 마감했다.

'근대' 베트남 독립운동 제1세대 중에서 대표적인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는 판 보이 쩌우는 20세기 초반에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개혁적인 혹은 급진적인 방법을 동시에 구사하며 자국의 해방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그가 투쟁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하지 못하여 '운동의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가능하지만,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소식이 판 보이 쩌우로 하여금 자국의 독립운동에 "극렬한 폭동"을 전술로 채택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치열한 삶 또한 당시의 한국인들에게 적지 않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월남망국사』를 통해 1905년부터 한국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한 판 보이 쩌우의 명성은 한국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등을 통해 19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또한, 신규식이 사망한 이후 민필호에 의해 1939년 발행된 『한국혼』에는 이 책의 발간을 축하하는 "월남 혁명가" 판 보이 쩌우의 서문도 함께 실리게 되었다. 항주(杭州)에서 민필호와 알게 된 판 보이 쩌우는 계축년(癸丑年, 1923) 6월 5일자의 『반서(潘書)』에서, "한국과 우리 월남은 아시아의 형제국으로 인종과 학통이 같더니, 이제는 고통마저 같구나"라고 하며 "예관(睨觀, 신규식의 호) 선생의 한국혼은 한국 인심(人心)에 대한 대사진(大寫眞)"이라는 평가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