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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 8일 새벽 "역사상 고금을 통틀어 전례 없는 흉악한" 사건이 조선에서 벌어졌다.서울에 주둔 중이던 일단의 일본군과 무뢰배들이 경복궁을 침범해서 건청궁까지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이다. 칼을 휘두른 범인은 일본 육군 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였다. 이날 오전 9시 20분 니이로 도키스케(新納時亮) 해군 소좌가 '국왕 무사, 왕비 살해'라는 1차 보고를 대본영 참모본부에 타전한다.

극비 도장이 찍혀 있는 이 전보문이 긴급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대본영에 즉각 보고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군사작전이었다. 총지휘자는 청일전쟁의 기획자였던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였다. 히로시마 대본영의 육군상석참모와 병참총감을 겸한 그는 1895년 10월 두 가지 긴급 작전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그중 하나가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약점을 알게 된 조선이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멀리하자 이런 움직임의 중심인 왕비를 시해한 작전이었다. 다른 하나는 시모노세키강화조약으로 획득한 대만에서 강력한 저항이 일어나자 근위사단과 제2사단 그리고 혼성제4여단 등 약 7만6천여 병력을 보내서 벌인 대규모 점령전쟁이었다. 최종 결정은 누가 내렸나? 물론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그를 비롯해서 조선 침략을 최대 당면 목표로 삼았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 메이지유신 원훈들도 책임이 있다.

조선에서 일본군이 궁궐을 침범해 왕비를 시해한 사건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군주제를 유지해온 유럽 열강에서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울 주재 간첩 두목인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 중좌는 가와카미에게 그런 사태를 긴급 보고하고 있다

을미사변의 전모를 밝혀낸 연구는 2009년에 나왔다. 재일동포 학자 김문자가 펴낸 저서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에서 시해범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렸다. 한국사 연구에서 가와카미 소로쿠란 이름도 여기서 처음 나왔다. 광복 64년만의 일이다.

을미사변 120주년, 광복 70주년의 역사 연구

올해는 을미사변 120주년이고 광복 70주년이다. 지난해에는 동학농민혁명·청일전쟁·갑오개혁 120주년과 러일전쟁 110주년을 맞이해서 여러 단체와 학회가 각종 기념사업을 펼쳤다. 그 중 두드러진 행사가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주제로 열린 학술 발표회였다. 그렇지만 연구에 전환점을 찍는 중요한 학술발표회는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비해 중국 산동성 웨이하이(威海)시에서 열린 청일전쟁 120주년 기념학술대회는 무려 120편이 넘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기존 주제와 주요 사건을 망라한 것이지만, 청일전쟁 연구의 전기를 이룰 만한 학술대회였다. 우리가 본받을 필요가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2015년 한국은 120년 전과 다른 나라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발전한 모습이 명확하고 국제사회에서도 위상이 달라졌다. 매년 각 분야에서 학술연구 성과를 적지 않게 축적하고 있고, 한국사학 분야도 커다란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꼭 해야 할 연구가 아직도 공백 상태인 것은 큰 문제다.

한국근현대사는 동아시아 차원에서 조망해야 보이는 것이 많다. 1차 사료도 일본과 중국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적지 않다. 120년 전 을미사변의 실상은 국내 자료만으로 연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재일동포 학자가 귀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자료 수집과 연구 방법에서 한 단계 성장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뒤에 숨은 사람들

망국과 식민지 경험을 학문 성과로 후세에 전하는 일이 역사학도의 의무다. 먼저 매국의 상징인 이완용과 오적 뒤에 숨은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 국권 상실부터 헤아리면 36년, 통감부 설치까지 따지면 무려 40년, 1894년 경복궁 기습점령부터 보면 50년간 일본의 압제 밑에서 신음했다. 망국의 책임을 물어야 할 고위직, 적극 협력한 왕족과 고관들은 이름까지 희미해지고 있지만, 지금도 말단에 있던 사람들의 협력 행위를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 더 중요한 일은 침략의 상징인 이토 히로부미 뒤에 감추어진 이노우에 가오루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등의 죄상을 밝히는 것이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육사 출신 소장장교를 선발해서 조선에 스파이로 보냈다. 이들은 정보 수집과 지도 작성 등 간첩활동과 함께 경복궁 기습과 왕비 시해, 그리고 동학농민군 섬멸 작전과 의병 학살을 선도했다. 일본의 침략 목표가 확대되자 정보장교들은 활동지역을 넓혀갔다. 조선과 중국에서 시작한 간첩활동은 러시아 등 유럽으로 확대되었다. 일부만 들어도 대단한 인물이 나온다. 1894년 경복궁 기습을 이끈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安正)는 1892년에 시베리아를 혼자 횡단해서 유명해졌고, 러일전쟁 때 러시아 국내 교란을 꾀했던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는 데라우치 통감 아래서 헌병사령관 겸 경무총장으로 국권탈취와 무단통치를 실행하였다.

이들을 거의 조사하지 않은 것이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치명적인 결함이다. 하나 덧붙이면, 한국어에 능숙했던 종로경찰서 고등계 경부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에 관한 연구가 한 편도 없다. 그는 민족지사 탄압과 독립운동가 검거에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패전 직후 일본으로 돌아가 여유로운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웃나라 일본은 오랜 세월 한국과 역사 경험이 뒤엉긴 나라이고, 미래에도 애증관계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할 나라다. 동행과 협력의 기초는 치밀한 역사연구를 바탕으로 과거사를 직시하고, 이를 극복한 위에서 쌓을 수 있다. 망국의 아픈 경험을 한 우리는 일본 지식인은 물론 세계 지성이 수용할 만한 연구를 해야 했다. 광복 70주년이 된 오늘도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은 역사학도가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