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27년간 총리(1958년까지 외교부장 겸임)를 지낸 중국의 지도자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가 한반도에 다녀간 적이 있을까? 그가 남긴 《여일일기(旅日日記)》에는 일본 유학 중이던 1918년 7월,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기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하여 기차로 갈아타고 서울과 평양을 거쳐 단동에 도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저우언라이는 장쑤성(江蘇省) 화이안(淮安) 출신으로 소년시절 백부를 따라 동북에서 생활하였고, 텐진(天津)의 난카이(南開)에서 학교를 다녔다. 일본 유학 중이던 그에게 1919년 3·1운동은 큰 인상을 남겨, 그해 7월 〈텐진학생연합회 회보〉에 "조선의 3·1독립운동은 5·4운동과 함께 세계 신사조의 영향을 받았고 동아시아 역사상 각 민족을 더욱 자각케 한 사건이었다."며 연대의식을 표현하였다. 특히 안중근 의거를 높이 평가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쓰러뜨린 안중근 의사의 쾌거야말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는 한중공동투쟁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1919년 텐진 난카이대학에서 연극 〈안중근〉(일명 '망국한(亡國恨)')을 공연하였는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도 저우언라이는 반일투쟁을 고무하기위해 극단을 조직하여 무한·장사 등지에서 〈안중근〉을 공연한 바있다.
청년 저우언라이, 3·1운동과 안중근의 쾌거에 연대를 표하다
저우언라이는 1920년 텐진 〈익세보(益世報)〉 유럽 통신원으로 프랑스에 유학하고 1924년 황푸(黃浦)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어, 교관으로서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주목할 것은 황푸군관학교에 교관이나 학생으로 있던 한국 청년들이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황푸군관학교 기술주임교관이었던 양림(楊林)을 비롯하여 저우언라이가 양성한 한인 군사 지휘자가 다수 있다. 그중 일부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의용군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듬해인 1938년 저우언라이는 조선의용대 건립을 지지하고, 1940년 9월 충칭(重慶)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발대식에는 그가 직접 부인 덩잉차오와 함께 중국공산당 대표로 참석하여 축하해주었다.
1942년 10월 임시정부가 한중문화협회를 결성할 때는 명예이사를 맡았고, 항일투쟁을 위해 한중연대에 힘썼다. 1942년 11월 저우언라이는 한중문화협회에서 '한국독립문제'로 강연하면서 "한국 동지들은 중국을 위해 피를 흘렸다. 멀지 않은 장래에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실현할 것을 희망한다"고 호소하였다. 1945년 11월 임정이 환국할 때 저우언라이도 충칭의 팔로군 주최로 연회를 열어 환송하였다. 이때 김구·김약산 등 임시정부 인사들이 참석하여 한중 친선관계사에 길이 남을 미담을 남겼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은 참전을 결정하고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는다는 의미로 '항미원조전쟁'이라 명명하였다. 동북지방에서 살았고, 학창시절 부산을 거쳐 일제에 침략당한 한반도를 직접 둘러본 저우언라이에게 38도선을 넘어 압록강에 도달한 미군은 일본군의 새로운 동반자로서 중국의 동북지역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또 그는 이 전쟁이 중국을 위태롭게 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순망치한 관계에 있는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 온 중국의 전통적인 전략과 일맥상통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총리이자 외교부장으로서 전쟁을 수행할 책임을 맡은 저우언라이는 중국인민지원군에게 북한과 협조를 강조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 먼저 북한의 의견을 구하도록 지시하였다. 하지만 전쟁의 승패를 중시한 그는 군사지휘권과 더불어 철도도 중국군이 통제하도록 하였다. 전쟁이 길어지고 미군뿐 아니라 중국 역시 전쟁을 끝낼 기회를 여러 번 놓치면서 정전협정 체결이 2년 이상 지연되었다. 저우언라이는 '일면협상 일면전투'정책을 세우고, 정전협정에 유리한 국면을 얻고자 하였다.
마침내 1953년 7월 조인된 정전협정은 군사상 정전으로 한정되었고,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라는 제한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조선 정치회의문제에 관한 성명(1953.8.24)'에서 정전협정 조인 후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두었다. 1954년 제네바에서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회의가 열렸지만, 아무런 합의도 이루지 못한 채 끝났다. 이후 저우언라이는 아시아·아프리카 신흥 여러나라의 제3세계 비동맹을 표방하는 '평화외교'를 실현하기 위해 애썼다.
'구동존이(求同存異)' 정신이 주는 교훈
저우언라이가 제창한 '평화공존 5원칙'(주권과 영토보전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상호내정불간섭, 평등호혜, 평화공존)은 중국이세계 모든 국가와 우호관계를 수립하고 국교를 맺는 기본 원칙이 되었다. 특히 차이를 접어두고 평화공존 원칙 아래 공통점을 찾는다는 그의 '구동존이(求同存異)' 정신은 국제사회 평화공존을 실현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북한과 중국의 국경획정협상을 하던 1958∼1964년에 북한 주요 인사들과 만나 "한민족은 고대부터 중국 동북부에 거주해왔으며, 발해는 한국사에 속하는 것이 출토 유물 등을 통해 분명하게 증명됐다"고 언급하였고, 1963년 6월 북한 대표단을 접견하면서 "요하~송화강 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예로부터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밝혔다.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2000년대 들어 고구려가 고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거나, 고구려와 발해사를 중국 고대사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