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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와 식민주의
  • 홍종욱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일본군위안부문제와 식민주의

 

홍종욱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지난 89일 재단은 국사편찬위원회의 공동 주최로 2024년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학술회의 주제는 동아시아의 전쟁·식민주의 인식과 기억 정치: 일본군위안부역사에 대한 앎과 지식이다.

 

 

1부 역사 갈등 극복과 탈식민주의 과제

 

1부 첫 발표는 이재승(건국대)식민주의와 국제법이었다. 발표에서는 국제법이 식민지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왔는지 유럽의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진출 논리를 통해 정리했다. 탈식민주의가 국제법에 영향을 주고 있지만, 과거 불평등조약의 효과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여전히 남은 문제이다. 한국 법원은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주장하지만, 그 근거를 한국 헌법에서 찾는 이른바 내재적 논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새로운 국제규범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두 번째 발표는 김민철(국사편찬위원회)식민지 근대화론에서 반일 종족주의: 한국 역사 부정론의 사상적 배경이었다. 발표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 부정론에 공통된 이념적 배경으로서 21세기판 사회진화론이라고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문명 대 야만 또는 실패한 북한 대 성공한 남한이라는 승리 사관, 그리고 민중 혐오의 엘리트주의를 들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능력주의 신화에서 비판적 역사학도 과연 자유로운지 스스로 되돌아보게 되었다.

세 번째 발표는 오타 오사무(도시샤대)1950년대 재일조선인 특권론과 식민지주의였다. 발표에서는 일본 외무성이 1958년 각 부처에 보낸 재일조선인 특권에 관한 조사 의뢰의 건과 이후 전개를 분석했다. 4차 한일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정작 각 부처가 밝힌 여러 조치 가운데 재일조선인의 권리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아무리 내부문서라 하더라도 일본 정부가 공식 문서에서 특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이 눈에 띄었다.

 

 

2부 식민지 없는 식민지 역사 이해와 일본군위안부문제

 

일본군위안부문제에 초점을 맞춘 제2부 첫 발표는 송연옥(아오야마가쿠인대)제국주의 일본의 전쟁과 성 정치였다. 발표에서는 대륙 침략과 러일전쟁 과정에서 일본군이 운영한 위안소실태를 밝혔다. “태초에 위안소가 있었다(めに慰安所ありき)”는 발표자의 표현은 공창제와 위안부제도를 구분하려는 시도가 비역사적인 정쟁일 뿐임을 지적한 것이다. 이처럼 성 정치는 제국의 핵심적 규범에 깊이 관여하기 때문에 근대 규범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 없이는 위안부문제의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두 번째 발표는 이날 학술회의 기획자이기도 한 박정애(동북아역사재단)국제연맹의 여성매매 억제 협약과 일본의 대응: 식민지 비가시화 문제를 중심으로였다. 일본 정부는 1921년에 성립한 여성아동매매 억제를 위한 국제협약식민지 제외조항을 두고 1925년에 비준했다. 국제사회와 폐창단체는 일본의 공창제가 국제규범에 위반된다고 비판했으며 그 과정에서 창기라는 호칭이 제국의 체면을 해친다는 의견이 대두했다. 발표에서는 이런 상황 속에 1932년 이후 위안부라는 새로운 개념과 실태가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발표는 도노무라 마사루(도쿄대)위안부를 둘러싼 역사 연구의 현상과 과제였다. 도노무라는 이제까지 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운동가와 연구자들이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밝히고자 정책적인 강제동원 입증을 목표로 해왔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이 가장 심한 인권침해라고 전제했기 때문이지만, 법을 따르지 않는 자의적인 행동이 오히려 더 심각한 인권침해일 수 있다고 고발했다. 공창제 시스템에는 나름의 원칙과 표면적인 태도가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법 바깥의 사창이 횡행했다. 이러한 비합법적인 매춘이 놓인 비참한 처지는 이후 등장하는 위안부의 처지와 유사하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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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
국제학술회의 참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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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학술회의 회의장 전경

 

 

위안부문제의 본질은 식민주의와 여성 인권

 

회의 전반에 걸쳐 다양한 질의응답이 오고 갔다. 특히 일본 제국에서 식민지는 어떤 곳이었는지 근본적으로 질문하면서 위안부문제를 해명하려는 도노무라 마사루의 발표에 많은 질문이 집중되었다. 도노무라는 식민지 조선의 공창제와 성매매업 실태에 입각하여 공창제와 위안부제도의 관련성을 따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공감되는 문제의식이었다.

공창제와 위안부제도의 관련성은 중요한 쟁점이다. 공창제와 위안부제도 모두에서 일종의 근대성과 합리성을 보는 존 마크 램지어의 입장이 긍정적 연속론이라면, 공창제의 인권침해를 비판하고 그 연장선에서 위안부가 더 가혹한 조건에 놓였다는 요시미 요시아키의 주장은 부정적 연속론이라고 할 수 있다. 도노무라 주장의 특징은 공창제 실태를 일본과 조선으로 나누어 파악한 데 있다. 오해를 무릅쓰고 이러한 인식을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표

 

도노무라는 식민지 사창의 비참한 처지와 위안부제도의 유사성을 보았다. ‘위안부모집과 운영의 기원을 식민지에서 구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든다. 공창제 아래 있던 일본인 여성들은 어찌하여 위안부라는 더 가혹한 조건을 받아들였고 어째서 전후 피해 보상 청구에 적극적이지 않았는가. 도노무라가 제기한 조선 내에서 비합법적으로 여성들을 모았다고 해도 이동과 점령지 등에서 수용하고 위안소에서 취로 절차를 밟을 때 왜 점검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라는 문제와도 통하는 지점이다.

아마도 전시체제라는 극단적 상황 탓이었을 것이다. 예컨대 전쟁 말기인 1940년대에는 국회의원 선거조차 유명무실해져서 허울뿐인 민주주의도 작동하지 않았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경시하는 식민지적 관행과 태도가 전쟁이라는 비상시를 틈타 제국 중심으로 역류한 셈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는 민족은 자신이 찰 족쇄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도 한국 출신 위안부피해자에 대한 거부감이 일본인 위안부피해자의 인권을 억누르고 있다. ‘위안부문제는 늘 일본인 피해자도 넣어서 생각해야 한다.

식민지 조선은 헌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일본 본국과 구별되는 이법(異法) 지역이었다. 그러나 위안부동원 문제와 깊게 관련된 여성매매 억제 국제협약을 일본 정부가 비준하면서 식민지를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 것을 생각한다면 식민지 조선은 일종의 무법(無法)지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무법지대적 성격이야말로 식민지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식민지 상황을 놓고 도노무라는 식민지 조선의 경찰력이 충분하지 않아 불법 매춘과 인신매매를 거의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으로 보았다.

다만 이는 자칫하면 식민 당국의 행정력과 통제가 강해져 피식민자의 형편이 좋아질 거라는 논리를 불러올 우려가 있다. 통치의 불균등성은 결국 자원 배분의 문제라고 했을 때 피식민자의 인권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은 식민주의 그 자체다. 식민 권력의 자의성, 즉 식민자가 무법적 상황을 방치하고 때로는 이용한 측면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잘 그렸듯이 아무리 경찰력이 강해도 그들은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는 데 동원될 뿐 시골에서 일어나는 연쇄 강간 살인 사건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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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일보』에 6회에 걸쳐 연재된 기사 「인육시장」에 삽입된 삽화. (1925.8.22~30), 

당시 기사는 여성매매 문제를 방치하는 경찰을 비판했다.

 

 

한편 도노무라는 공창제 운영에서 이윤 추구라는 경영의 합리성 탓에 창기에 대해 유화적 태도가 존재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인식은 부분적으로는 위안부제도 이해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이는 위안부제도가 무자비한 폭력 없이는 전혀 운영될 수 없었다는 사고 못지않게 입증하기 어려운 명제다. 무엇보다 위안소 업자가 합리적 경영 주체라는 전제가 그다지 믿을 것이 못된다.

따지고 보면 전쟁과 식민 지배 자체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식민 지배는 원료의 조달, 상품의 수출 등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만 역사적 실태로서는 식민주의가 식민 지배보다 선행한다. 즉 경제적 논리는 비합리적인 식민지 획득과 유지를 위해 동원될 뿐이다. 일본의 조선 통치 실상을 보면 당국의 비합리적 식민주의가 오히려 통치의 합리성을 해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공창제와 위안소의 실태에 대한 접근도 피해자의 증언 등을 토대로 선입견 없이 사실을 축적해갈 수밖에 없다.

 

 

한일 공동 기구 설치하여 위안부실태 밝히고 피해자 구제해야

 

일본 정부는 한일청구권협정에서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이 이루어졌다고 강변하지만 양국 정부와 시민 사회는 사할린 한인 지원, 원폭 피해자 원호, 한센병 피해자 보상 등의 추가적인 조치에 합의해 온 경험이 있다. 위 문제들과 달리 위안부피해자 보상 문제가 곤란을 겪는 이유는 위안부문제에는 일본의 본국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위안부피해자 문제는 오롯이 일본 사회의 여성 인권 문제이기도 하다.

과거사 문제는 애당초 한일 간의 문제라기보다 양국 정부와 양국의 피해자·시민 사회 사이의 문제다. 모든 것을 일본 탓으로 돌리기보다 지금이라도 한일 두 정부가 공동으로 기구를 설치하여 피해자를 구제하고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에 나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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