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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30년대 국제사회의 인신매매 억제규범과 식민주의 문제
  • 박정애 재단 한일연구소 연구위원

1920~1930년대 국제사회의 인신매매 억제규범과 식민주의 문제

 

박정애 재단 한일연구소 연구위원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사이 그러니까 전간기(戰間期) 국제사회의 여성인권규범을 살펴보는 이유는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기 위해서다. 현재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최대 쟁점이 위안부공창이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위안부공창을 대등하게 비교하려는 시도는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반지성주의 행동이며 이는 정쟁으로 수렴되어 사회를 분열시킬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는 길은 다시 역사로 돌아가 아시아·태평양 전쟁기 일본군위안부제도의 출현이라는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전간기 국제연맹의 여성아동매매 억제 국제협약과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공유된 식민지 비가시화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국제연맹의 여성아동매매 억제 국제협약과 식민지 제외조항

 

거세지는 폐창운동을 배경으로 19세기 말 이후 유럽사회에서는 백인 여성을 둘러싼 성매매 금지 대책을 강구했다. 이는 국제적 인신매매(human traffic/trafficking) 문제라는 개념으로 수렴되었다. 논의는 20세기 들어와 본격화되어 19045월 파리에서 백인노예 매매 억제를 위한 국제협의’, 19105월 파리에서 백인노예 매매 억제를 위한 국제협약이 체결되었다.

 

사진1_원고파일 내 사진이름으로 넣어주세요.

중국 난징에 개설된 위안소인 세이난로
(淸南樓) 간판(『오사카아사히신문』 1939.12.3.)

 

1차 세계대전 후의 폐허 위에서 1920년에 성립한 국제연맹은 자유와 평화, 정의, 인도 정신을 이끄는 국제조직이자 세계의 경찰임을 자임하면서 연맹 규약 제23조에 따라 국제적 인신매매를 관리·감독할 권한을 가졌다. 그리고 1904년과 1910년의 국제규범 내용을 보완하여 19219, 제네바에서 여성아동매매 억제를 위한 국제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만 21세 미만 여성을 대상으로 타인의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부도덕한 목적으로 모집, 권유 또는 유인하는 자그리고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타인의 욕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기 또는 폭력, 협박, 권력남용의 수단을 이용하거나 그 외 모든 강제적 방법에 의하여 부도덕한 목적으로 모집, 권유, 유인한 자범죄를 구성하는 각각의 행위가 다른 나라에서 이뤄졌다 해도 처벌받아야 한다는 국제법이 제정되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21세 미만 여성은 본인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리고 성인 여성은 모집, 권유, 유인 등 모든 강제적 방법에 의하여 해당 범죄의 대상이 되었을 때 피해자 요건을 구성하게 된다. ‘공창이든 위안부든 상관없이 말이다.

아시아의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로서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일원으로 국제연맹에 참여한 일본은 국제협약 가입을 제국의 체면문제로 생각했다. 이에 따라 1921년 국제협약에 즉시 가입했지만 연령 제한과 식민지 가입 문제가 논쟁이 되어 이 두 문제를 보류하는 조건으로 1925년에야 가입을 비준했다. 연령 제한 보류는 1927년에 철폐되었지만 식민지, 조차지 등을 협약 적용에서 제외하겠다는 보류 조항은 끝끝내 유지되었다.

식민지 제외 조항에 대해 일본 정부는 식민지에서 조선인, 타이완인과 해외에 돈 벌러 나간 추업부(醜業婦)에게 [이 협약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애매모호하게 설명했다(고쿠민신문1925.8.29.). 그러나 당시 도쿄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조선, 타이완, 관동주 등을 이 조약의 적용 밖에 두려는 것은 소위 낭자군(娘子軍)을 선두에 세워 개발하는 우리나라 식민정책과의 관계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협약의] 정신 자체에 반역하는 무리한 주문이다”(1925.8.29.)라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식민지 확장과 일본 제국의 성 정치

 

과연 그러했다. 일본은 군대를 앞세운 대륙 진출전쟁점령식민지 확보라는 제국의 확장 과정에서 여성의 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법령 등을 만들어 관리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1896118일 자 지지신보(時事新報)인민의 이주와 창부의 돈벌이라는 글을 써서 해외 각지에 주둔하는 군대·병사의 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창부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던 사실은 유명하다. 일본은 청일전쟁 후에는 타이완에서 성매매 관리를 시작했으며 러일전쟁 후에는 관동주에서 성매매 관리를 시작했다.

1876년 조선과 조일수호조규를 맺은 뒤에는 1880년대 초부터 거류지인 부산, 원산 등에서 성매매 관리를 시작했다. 송연옥의 연구에 따르면 조일수호조약 체결 과정에서 전권변리대신을 맡은 구로다 기요다카(黒田清隆)가 후원하는 도쿄 요시와라의 유곽’, 즉 합법 성매매 업소가 부산으로 들어왔다.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뒤에는 서울의 조선인 여성들에 대해 성매매 관리를 시작했고(1908),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뒤에는 성매매 관리 법령을 전국적으로 일원화했다(1916). 당시의 식민자들은 애초에 술과 여자라는 것은 식민정책에 제일가는 의의가 있으며, 이는 비단 조선, 만주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략] 이역만리 땅에서 사방 풍물이 사람을 위로하는 자가 없는 곳일지니 특히 술과 여자가 그리워지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경성의 예창기매매법, 조선과만주89, 1914.12.)라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사진2-1_사진2-2_

영화 제겐(女衒) 포스터(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1987)(좌) 무라오카 이헤이지 자서전 표지(우). 

표지에 “여자를 파는 것도 나라를 위해”라고 쓰여 있다. 제겐은 여성매매 업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화 제겐은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에서 여성매매업을 했던 무라오카 이헤이지의 자서전에 바탕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1941년 말, 말레이시아에 상륙한 일본군에게 무라오카 이헤이지가 ‘여자가 있다’며 다가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러나 1921년 국제협약에 일본이 가입·비준하고 국제적 인신매매 및 일본의 공창제도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면서 일본 식민지 등에서 벌어지는 인신매매 문제의 심각성이 고발되기도 하였다.

 

사진2

 

 

국제연맹의 동양 여성매매 조사와 식민지 비가시화

 

전간기 국제연맹의 인신매매 억제규범은 백인 여성 피해에 초점이 있었고 식민지 가입 여부를 그 종주국의 재량에 맡겨두었다는 점에서 인종주의, 식민주의, 유럽중심주의 등의 문제가 내재해 있었다. 국제연맹은 국제협약의 이행 사항을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1922년 여성아동매매 문제 자문위원회를 꾸렸다. 그리고 1924~1926년까지 유럽과 지중해, 아메리카 지역을 대상으로 실지조사를 하고 1927년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때 인신매매 범죄의 거점이자 원인으로 면허 성매매 업소가 지목되었다.

이어서 동양 여성아동매매 실지조사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93010월부터 19321월에 걸쳐 동양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위원회가 관동주와 조선, 일본을 방문한 것은 1931529일부터 712일 사이였다. 일본은 인신매매 문제를 제국의 체면문제로 여겼지만 공창제도에서 비롯되는 인신매매 원인을 점검하기보다는 국제적인 힘의 질서에 의지하여 이 문제를 벗어나고자 했다. 아시아의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이자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 동시에 여성아동매매 자문위원회의 일원으로서 처음부터 인신매매 조사의 목적과 원칙, 방법을 정하는 데 개입하여 일본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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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맹 여성아동매매 자문위원회
(United Nations Library & Archives Geneva 소장)

 

조사위원회는 동양의 백인여성 매매와 중국인의 매매 실태에 관심을 두었으며, 일본 내외의 인신매매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본은 식민지, 조차지, 점령지 등에 있는 조선인, 일본인, 타이완인 등의 예기·작부 존재가 여성의 자유의사에 의한 것이지 매매 범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는 데 주력했다. 조사위원회는 이러한 해명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끝까지 추궁하지는 않았다. 식민지 등 일본의 해외 정치세력권 내에서 창기보다 예기나 작부, 나카이(仲居)라는 호칭으로 포장되어 여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국제연맹의 동양 조사 이후, 일본 정부는 형식적으로 창기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 주력했고 폐창운동가는 창기 제도 폐지 운동에 더욱 화력을 붙였다. 매매되는 존재를 상징하는 창기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대신 작부나 예기, 여급의 이름을 쓰는 비면허 등록 성매매 여성에 대한 국가 관리가 강화되었다. 면허 성매매 제도, 곧 창기 제도의 존재는 제국의 체면과 관계된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32년 상하이 사변 이후 군대를 앞세운 전쟁터나 점령지에서 일본 병사를 상대하는 여성을 위안부라고 부르는 경향이 생겨났다. , ‘위안부는 일본이 인신매매에 대한 국제규범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눈속임을 위해 만들어낸 신조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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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재 합법 성매매 지역(신정)의 병원을 방문하고 나오는 조사위원회 일행(『매일신보』 1931.6.7.)

 

 

국제연맹의 인신매매 논의에 참여하면서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일본 세력권 내에서 일본 남성을 상대로 성매매하는 여성들이 인신매매 피해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논리를 개발했다. 일본 내지의 창기 제도 구조에 입각한 창기의 자유의사와 당국의 엄격한 단속을 형해화된 법률 조문에 기대·강조하는 방식이었다. 식민지의 실태는 은폐 또는 왜곡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 공론장 안에서 제대로 언급조차 되지 못했다. 힘의 역학관계에 따른 국제사회의 질서 속에서 일본 내지와 그 세력권 안에서 다양한 층위와 양태를 지녔던 인신매매 문제는 오랫동안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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