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과 ‘인간’ 사이에서
길을 잃은 독립운동가의 재현, 영화 <영웅>
임동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뮤지컬 <영웅>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와 재판 과정, 그리고 죽음을 다룬 뮤지컬이다. 대중적으로는 ‘누가 죄인인가’라는 곡이 널리 알려져 있다. <영웅>은 근현대사 연구자로서 분명히 아쉬운 점은 있지만 창작 뮤지컬로서 크게 호평을 받은 뮤지컬이다. 윤제균 감독이 뮤지컬 <영웅>을 영화로 제작한다고 했을 때 기대도 있었지만 우려도 컸다. 원작이 가진 역사 해석의 아쉬움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원작 뮤지컬을 영화로 얼마나 잘 재현할지도 궁금했다. 기대반 우려반으로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은 역사 해석에서 원작보다 더 많은 문제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틀에 박힌 여성의 모습
원작 뮤지컬과 영화에는 세 명의 여성독립운동가가 등장한다. 안중근의 어머니인 조마리아(나문희 분), 궁녀에서 게이샤(芸者)가 되어 스파이 역할을 하는 설희(김고은 분), 마지막으로 영화 버전 기준으로 연해주 의병 때부터 함께한 소녀 마진주(박진주 분) 등이다. 세 명의 여성독립운동가들은 뮤지컬과 영화에서 전형적인 여성의 성 역할에서 나아간 해석을 보여주지 못한다. 순수하고 고결한 어머니와 소녀, 아니면 남성을 유혹하는 팜므파탈의 존재. 설희와 마진주는 가상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실존 인물인 조마리아도 여전히 어머니로서의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그동안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고 연구한 역사학계의 성과를 고려한다면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영화 <영웅> 속 조마리아(출처: CJ 엔터테인먼트)
코믹하기보다는 우스워져 버린 독립운동가
아마도 감독과 작가는 독립운동가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역사 속 독립운동가들을 개그 캐릭터로 연출한 것은 문제가 있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카사노바 캐릭터 장성기(류승룡 분)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여 마초적인 모습이 부각한 조도선(배정남 분), 군대 신병처럼 총구를 주변으로 돌려서 동료들을 놀라게 하고 작전 중에 마진주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못하는 유동하(이현우 분),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의거에 참가하기를 무서워하고 유동하가 돌린 총구에 겁에 질려 바닥에 엎드려 버리는 우덕순(조재윤 분). 마초, 어리버리, 겁쟁이. 만약 이들이 가상인물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시도하는 영화였다면 우리는 감독과 작가의 의도대로 독립운동가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모습으로 연출한 사람들이 실재 역사 속 독립운동가였다는 점이다. 적절하지 못한 연출이었다. 그렇다고 독립운동가들을 절대적 존재로 신성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미 원작 뮤지컬에서 ‘장부가’를 통해 독립운동이라는 대의와 죽음의 공포 사이에서 갈등하는 ‘영웅’ 안중근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독립운동가의 인간적인 면모이지,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한 모습은 아니다.
영화 <영웅> 포스터(출처: CJ 엔터테인먼트)
국제적 연대가 사라진 민족운동
뮤지컬 <영웅>에는 중국인 왕웨이와 링링이 등장한다. 왕웨이와 링링은 각각 뮤지컬 곡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비중이 있는 역할이다. 그리고 당대 민족운동이 가지고 있던 국제적 연대를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특히 왕웨이가 부르는 뮤지컬 곡 ‘배고픈 청춘이여’는 극 중의 긴장감을 풀어주고 웃음을 주는 노래이다. 동시에 고향을 떠나 러시아에 온 조선 청년들이 중국인 왕웨이가 만들어 주는 만두를 먹으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장면은 국제적 연대의 훌륭한 상징이다. 왕웨이가 안중근의 거처를 밝히지 않고 죽으면서 부르는 ‘흔들림없는 태산처럼’과 조선 청년들이 죽은 왕웨이의 여권을 가지고 하얼빈으로 거사를 떠나는 모습도 국제적 연대를 은유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왕웨이와 링링을 조선인 마두식(조우진 분)과 마진주로 변경하였기 때문에 국제적 연대라는 성격이 사라져버렸다. 민족운동의 범위와 의미가 축소되면서 뮤지컬 곡 ‘배고픈 청춘이여’와 ‘흔들림없는 태산처럼’이 가지는 의미도 축소되었다. 이러한 각색은 오히려 원작 뮤지컬에 비해서 퇴보한 역사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새로운 해석을 기대하며
올해 말 또 한 편의 안중근 영화가 나온다고 한다. 안중근의 독립운동과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크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안중근과 독립운동가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될까. 역사적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언제나 기대가 된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영화 <영웅> 속 등장인물(출처: CGV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