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노 오사무(久野収, 1910년 6월 10일~1999년 2월 9일)는 일본 관서지방의 오사카부(大阪府) 사카이시(堺市)에서 태어났다. 교토(京都)대학 학부와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에는 일본의 왕족을 비롯한 귀족들이 다니는 대학으로 알려진 가쿠슈인(学習院)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쿠노는 본업인 대학교수로서의 철학자 이외에도 평론가로서 일본의 비판적 저널리즘 형성에 기여했으며, 사회운동가로서 일본의 전후민주주의와 평화운동, 그리고 생활정치운동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학교수로서의 쿠노의 이력은 전형적인 일본의 엘리트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것은 그의 단면에 불과하다. 쿠노의 인생의 전기는 그가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33년에 찾아왔다. 당시 교토대학 법학부 교수였던 다키카와 유키토키(瀧川幸辰)의 강연내용과 저서가 마르크스주의적이라며 불온시했던 일본정부는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문부대신이 다키카와에게 '휴직처분'을 내림으로써 강제로 교단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일명 '다키카와사건'이라고 하는데, 쿠노는 대학생 신분으로 다키카와교수를 구명하는 운동에 개입했다. 이 사건이 쿠노의 인생방향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일본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의 형태를 나타내야 하며, 소수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의 쿠노 오사무
쿠노는 다키카와사건을 계기로 학문의 길과 현실은 괴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인식하였고, 그러한 인식은 그를 저널리즘의 세계로 인도했다. 대학을 졸업한 쿠노는 1935년 반파시즘 잡지 『世界文化』, 1936년 문화주간지 『土曜日』의 창간에 관여했다. 이 잡지들은 당시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중추적인 이념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지만,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언론으로서의 역할은 분명히 했다. 결국 쿠노는 이러한 언론활동으로 인해 일본제국주의 시대 우리의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억압하는 도구이기도 했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2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전후에는 쓰루미 슌스케(鶴見俊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등 일본의 진보적인 학자가 총 망라된 '사상의과학연구회'의 주요 멤버로 활동했다. 그 기관지인 『사상의 과학(思想の科学)』이 1962년 1월호에 천황제 특집호를 발간하는 과정에서 당시 출판을 담당했던 중앙공론사가 우익의 압력에 의해 무단으로 편집권을 침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사상의과학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던 쿠노는 연구회가 독자적으로 기관지를 출판하기로 결정하고 출판사인 사상의 과학사를 설립해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또한 '평화문제담화회', '헌법문제연구회' 등 평화를 매개로 한 시민운동에도 정력적으로 참여하여 1960년 안보투쟁,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단체인 베헤렌(ベトナムに平和を! 市民連合) 운동의 사상적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쿠노는 말년까지 저널리스트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하였는데, 1993년에는 진보적 주간지 『주간금요일(週刊金曜日)』의 창간에 관여하였고, 죽을 때까지 편집위원으로서 활동했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쿠노 오사무
쿠노는 그의 학문적 깊이나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의 면모, 사회 운동가로서의 왕성한 활동력에 비해 저평가된 인물이다. 특히 한국에서의 평가는 더더욱 그렇다. 그보다 4세 어린 마루야마 마사오가 도쿄대학 법학부에서 정치학 교수로 명성을 떨치며 세계적인 석학으로, 그리고 천황제에 반대한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인으로서 한국학계에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하면, 쿠노의 존재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마루야마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쿠노의 진면목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쿠노는 철학자였지만 경제학과 정치학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본인 스스로도 정치사상가, 사회사상가라고 말할 정도의 대사상가였으며, 또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시민운동가이기도 했다.
1970년 안보투쟁 이후 운동의 현장에서 사라진 마루야마 마사오를 많은 사람들이 서재(書齋)파로 부르며 비판했다. 하지만 쿠노는 오히려 그런 마루야마에 대하여 결핵과 좌폐상폐엽 적출, 급성간염 등의 병력을 겪으면서도 일반시민으로서 정치운동에 참가한 것을 높이 평가했으며, 마루야마야말로 일본에서 처음으로 학문을 정치와 종교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킨 독립아카데미즘을 실천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면서도 쿠노 본인은 시민운동에서의 행동과 실천에 주저함이 없었다. 함석헌 선생이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이자 행동하는 시민운동가로서, 그리고 엄청난 양의 저술활동을 하였던 대사상가로서,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저항운동가로서 상징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일본에서는 쿠노 오사무가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저항하는 지성인으로서, 그리고 평론과 저널리즘 활동을 통해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시민,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
쿠노를 이해하는데 가장 적절한 키워드는 '시민'이다. 쿠노는 1960년 안보투쟁 당시 국회의사당과 수상관저 주변의 거리를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참가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들의 사상적 의미를 밝혀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이들을 '시민대중'으로 인식하였다. 당시 일본의 언론들은 이들을 '군집'으로, 수상이었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폭도'로 인식했던 것과 비교한다면 쿠노의 인식은 시대를 앞서 깨어있는 시민을 발견한 것이었다.
쿠노는 직업을 통하여 생활을 유지하는 인간으로서의 시민이라는 정의를 부정한다. 그는 직업과 생활의 분리를 역설하며 그것을 분리하지 못하는 생활양식에서는 '신분적 인간'이 나타나고, 그것을 분리하는 생활양식에서는 '시민적 인간'이 나타난다고 한다. 쿠노는 "시민은 정치로부터 생활을 보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생활을 통해 정치를 보는 사람들”로 규정하며, 일본에서의 생활정치운동의 지적 토대를 제공했다.
쿠노의 시민운동에 대한 철학은 일본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기초가 형성되었다. 구체적 실천으로는 평화헌법의 이념을 현실세계에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인류공영의 평화체제를 만들어 가고자 했다. 따라서 그의 시민운동의 활동영역은 일본 국내 이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인류가 공유해야 할 가치에서부터 미국의 핵실험 반대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쿠노는 일본의 민주주의는 구미제국과 같이 피땀으로 이루어진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일본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피부로 민주주의를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의 형태를 나타내야 하며, 소수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강한 자가 다수의 힘으로 비민주적인 정책을 결정하려고 할 때, 이에 저항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쿠노는 지난 세기 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평생의 저술과 실천운동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그의 메시지는 일본에서 아직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