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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김홍집, 정권의 과오를 죽음으로 속죄한 책임정치가
  • 허동현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나는 먼저 폐하께 알현해서 폐하가 마음을 돌리시길 촉구하고 이뤄지지 않으면 일사보국(一死報國)하는 길밖에 없다."

김홍집(1842~1896)은 참판 김영작의 3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경주 김씨 가문은 5대조인 김주신의 딸이 숙종 비로 책봉된 후 대대로 고관을 배출해 온 벌족이지만, 권세를 부리기보다 청빈한 삶을 중시하는 가풍을 이어 왔다. 1868년 26세 때 처음 벼슬길에 나설 때 부친이 한 당부도 국록이 헛되지 않게 신명을 다해 국사에 충실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선공후사의 가훈은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승문원·예문관·훈련도감 등을 거쳐 호조참의에 오른 1880년 조선정부가 당면한 시급한 과제는 관세권 회복과 인천 개항을 둘러싸고 일본과 협상하는 일이었다. 이때 발탁된 김홍집은 지금의 외교부 역할을 하는 예조 참의에 올랐으며, 그해 7월 제2차 수신사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국왕의 전권을 위임받지 못했다는 핑계로 일본이 협상 자체를 거부해 세칙협상이 무산되자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여부를 정탐하는 데 몰두했다. 약 한 달 간 도쿄에 머물면서 메이지 유신 후 일본이 급격하게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며 일본 정·재계 인사와 중국 공사관 관계자들을 만나 국제정세에 관한 정보를 탐지했다. 이때 중국 외교관들조차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를 막을 방책을 세우는 것이 급선무라 입을 모았다.

일본에 머물며 『조선책략』을 만나다

압권은 황쭌센(黃遵憲)이 건네 준 『조선책략』이었다. "오대주 사람들이 다 조선이 위태롭다 하는데 조선인만 절박한 재앙을 알지 못하니, 불난지도 모르고 재재거리는 처마 밑 제비나 참새 꼴과 뭐가 다르겠소." 이 책은 '연작처당(燕雀處堂)'의 경구를 빌려 러시아의 침략을 막으려면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속을 다지고, 미국과 연대하여 자강에 힘쓰라"고 종용했다. 김홍집은 조선으로 돌아와 자강과 세력균형의 필요성을 역설한 이 책을 국왕에게 바쳤으며, 조선 정부는 숙고 끝에 개화자강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880년 말 개화자강정책 추진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이 만들어지자 통상사 당상에 올라 새로운 정책을 추동하는데 힘썼다. 1881년 정부가 일본과 중국에 근대문물 수용을 위해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과 영선사를 보내고 이듬해 미국·영국·독일과 차례로 수교할 때 그는 개화정국의 앞뒤에서 역량을 발휘했다.

그러나 『조선책략』은 조선의 살길을 알려주는 대책만은 아니었다. "중국과 친하라"는 주문 뒤에는 조선 스스로가 중국의 속국임을 만천하에 알리도록 하려는 속셈이 숨어 있었다. 중국이 조선 독립을 옹호하는 나라라는 가면을 벗은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당시, 외교 실무 당국자로 뒷수습을 맡았던 김홍집은 1885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지만 바로 한직으로 밀려났다. 왜냐하면 주로 일본 측과의 문제 해결을 담당하며 일본의 신뢰를 얻은 그를 위안스카이(袁世凱)와 민씨 척족정권이 친일개화파로 낙인찍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1894년 청일전쟁으로 중국세력이 밀려날 때까지 정치적으로 냉대를 당했던 그는 조선의 개혁을 위해 일본과 타협하는 길을 걷는다.

난세에 개혁을 꿈꾸다

청일전쟁, 갑오경장, 동학농민봉기, 명성황후 시해, 아관파천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진 1894~1896년, 열강이 각축하는 중에 5백 년 동안 이어온 왕조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같이 위태로웠다. 이 시기 김홍집은 일본을 등에 업고 네 차례에 걸쳐 총리대신을 맡았던 위기 관리자였다. 1894년 7월, 일본이 급조한 꼭두각시 정권에 참여한 그는 영의정 겸 군국기무처 총재, 총리대신으로 갑오경장과 을미개혁을 이끌었다. 조선을 부강한 근대 독립국가로 만들기 위한 급진적 제도개혁을 일본이라는 외세의 힘을 빌려서라도 추진하고 싶었던 그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는 300만 엔의 일본차관과 40여 명의 일본인 고문관을 끌어들여 나라의 독립과 부강을 꿈꿨다. 그러나 침략자의 돈과 인력을 빌려 추진한 개혁은 일본군의 군홧발 밑에 포장도로를 까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일제가 부리는 농간에 휘둘렸던 김홍집은 누란지위에 놓인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1896년 2월 아관파천 직후, 거리에서 무참히 참살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날 일어난 비극을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일본공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경관들이 김 총리를 경무청의 문 앞으로 끌어냈는데 인민들이 모여들어서 입추의 여지가 없음을 보자 칼을 뽑아들고 인민들을 쫓아 버린 다음 김 총리를 차서 쓰러뜨리고 경관 여러 명이 일제히 난도질하여 가슴과 등을 내리쳤다. 시체 다리부분을 거친 새끼줄로 묶어 종로로 끌고 와 시신을 드러내 놓고는 거기에다 '대역무도 김홍집'이라 크게 쓴 장지를 붙였다. 그러자 길을 가득 메운 보부상들이 시체에 큰 돌을 던지기도 하고 발로도 짓이겨서 온전한 곳이 한 군데도 없도록 만들었다(국사편찬위원회, 『주한일본공사관기록』 9, 1993)."

김홍집이 이끈 내각은 일본에 막대한 이권을 넘겨주었고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 법적 근거를 제공했으며, 황후시해를 방관하고 그 원흉들을 감싸는 친일행위를 자행했다. 그렇기에 "일본공사에게 굴종하는 줏대 없는 소인배"라는 박영효의 손가락질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나는 먼저 폐하께 알현해서 폐하가 마음을 돌리시길 촉구하고 이뤄지지 않으면 일사보국(一死報國)하는 길밖에 없다"며 죽음을 달게 받은 자세는 반일 민족주의 역사가 황현도 높이 평가하도록 만들었다. "김홍집은 화왜(和倭)를 주장하다가 청의(淸議)에 득죄하였으나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고 그 재간과 지략은 속류배가 따를 바 아니었다(『매천야록』)." 어찌 보면 망명으로 목숨을 부지하기보다 자기 정권이 범한 과오를 죽음으로 속죄한 그는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책임정치가였다. 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갸륵한 동기로 개혁을 이끌다 실패에 책임을 지고 죽음을 택한 김홍집의 삶은 오늘 우리 위정자들의 들메끈을 고쳐 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