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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격랑치는 동북아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 기연수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한러교류협회 회장

"슬프다 대한 사람들은 남에게 의지하고 힘입으려는 마음을 끊을진저. 청국에 의지하지 말라, 종이나 사환에 지나지 못하리로다. 일본에 의지하지 말라, 종내는 내장을 잃으리라. 로국에 의지 말라, 필경에는 몸뚱이까지 삼킴을 받으리라. 영국과 미국에 의지하지 말라, 청국과 일국과 로국에 원수를 맺으리라. 이 모든 나라에 의지하고 힘입으려고 는 아니할지언정, 친밀치 아니치는 못하리라."(독립신문, 1898년 1월 20일자-광무 2년)

동북아 지역에서 미·일·중·러 4개국의 역학관계가 과거는 물론 현재, 미래 어느 때를 막론하고 한반도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오늘날처럼 국제정치무대에서 동북아 지역 내 국가들 사이에 갈등이 커지고 격동이 소용돌이친 적은 없었다. 지금 이 지역에서는 미·중·러가 신(新)패권 경쟁이라도 하듯 불확실성의 게임을 벌이고 있으면서 중·일 마찰이 미·중 다툼으로 확대됨과 동시에 중·러는 밀월 관계가 정점에 달하고 있다.

집요한 미국의 중국 포위정책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4월 말 일본, 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아시아를 순방할 당시 일본에 들러서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의 안보 위협에 미국은 자동적으로 군사개입 한다는 미·일 안보조약 제5조를 공개 천명하는 한편 중국과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에 대해서도 일본의 실효 지배를 인정한다고 명확히 태도를 밝혔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에 중국은 맞받아치기라도 하듯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확실하게 장악하고자 이 지역의 해군력을 급속히 증강시킴과 동시에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까지 선포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시진핑 주석은 최근 국제무대에서 유라시아주의 전략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밀월관계를 과시하고, 중·러 연합으로 미·일동맹에 대처하는 반미·반일 공동전선을 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일본의 아베 총리는 이른바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미명 아래 집단자위권 행사 추진정책으로 새삼스럽게 한국과 중국을 자극하면서 동북아 지역에 불안을 흩뿌리고 있다. 특히 작년 11월 말 중국이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을 선언한 후 일본은 미국의 암묵적 지원을 받으며 중·일 양국의 접점 지역에 군함, 정찰기, 대형 순시선 등 병력을 집결시키는 등 매우 민감한 군사적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면서 차관급이었던 방위청을 장관급 방위성으로 승격하고, 집단방위권 행사를 적극 추진하면서 일본 재무장의 길을 확실하게 닦아 놓으려 하고 있다.

작금의 한반도, 한국은 바로 위와 같은 동북아 지역 국가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갈등 게임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빠져 있다. 이런 와중에 북한에서는 제4차 핵실험 조짐이 심상치 않고, 일본은 엉뚱하게도 북한과 협력·대화하는 것으로 궁색한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최근 방북한 독일 한스 자이델 재단의 젤리거(Bernhard Seliger) 박사는 나진·선봉 경제특구에 러시아와 중국이 경쟁적으로 투자하면서, 이 지역에 경제 발전과 변화의 조짐이 크다고 전했다. 그러나 사실 중·러가 북한에 경쟁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북·중·러 사이 세력관계에 미묘한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러한 대내외적 국제환경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작 우리 한 국이 처한 상황은 어떤가? 충 돌하는 미·일 동맹과 중·러 밀월 관계에서 G2인 미·중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주지하고 있는 우리와 일본의 갈등을 차치한다면 한국은 역시 동북아에서 한·미·일 3각 안보동맹에 대한 반발로 북·중·러가 우호협력 관계를 맺어 대응하면서 만들어내는 파도가 높게 치는 바다를 어떻게 헤엄쳐나가야만 하느냐가 당면 과제다. 그리고 이 당면과제는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 기조인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과 직결되어 있다.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를 이해해야

오늘날 국내에서는 물론 국제무대에서조차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는 것이 '유라시아주의'에 대한 논란이다. 그런데 사실이 유라시아주의의 발원지는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이며, 오늘날 국제정치무대에서 유라시아주의에 강력하게 불을 지핀 것도 바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다.

원래 유라시아주의는 사상·철학운동의 차원에서 1920년대 초 트루베쯔코이(Н. С. Трубецкой)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망명지식인들이 유럽문명의 횡포에 반발하여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라시아주의는 소비에트 시기 볼셰비키 체제에서는 시들해졌다가 소련 붕괴 후 점차 강력한 정치 이데올로기로, 운동으로 부활하였다. 그리고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러시아의 정치가, 지정학자들은 이를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러시아의 미래를 책임지는 메시아적 사명인양 활발하게 주장·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앞장서고 있는 유라시아연합(EAU), 유라시아경제연합(EEU), 상하이협력기구(SCO), 신동방정책 등은 모두 유라시아주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러시아의 세계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러시아의 세계 전략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정책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유라시아를 '하나의 대륙', '창조의 대륙', '평화의 대륙'으로 만들자는 3대 목표를 내걸고, 부산에서 출발하여 북한, 러시아, 중국을 거쳐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관통하는 '실크로드 익스프레스(SRX)'를 건설하는 등의 실천 과제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당연히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에 대한 이해가 불가피하다. 따라서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중국, 일본에 대한 연구만큼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더 많이 러시아에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우선 재단이 관련 전문가, 학자들에게 매일 제공하는 '일일동향 송부'에서 '러시아 관련' 난을 추가하는 것부터라도 시작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