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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고토쿠 슈스이, 전쟁없는 평등한 아시아를 꿈꾸다
  • 임경화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

지금부터 110년 전 만주와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이 벌어졌다. 청일전쟁으로 대만이라는 첫 번째 식민지를 획득한 일본이 영토팽창을 위해 제국주의 길을 강화하여 마침내 1910년 한반도 강제 병합을 단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쟁이었다. 전황은 주변국의 예상을 뒤엎고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1904년에 한반도 전토를 점령했고 1905년에는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찍이 문명화에 성공한 입헌국가가 전제국가 러시아를 상대로 거둔 문명의 승리로 자랑했다.

사상의 성장과 반전론 주장

하지만 당시 일본은 국내적으로 청일전쟁 후 급격한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그에 따른 사회문제도 심각했던 후발 자본주의 국가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이 두 차례의 승전과 식민지 획득을 천황에 충성을 다하는 신민들의 애국심이 가져온 풍요라고 포장하면서 순탄한 국내 통합의 길을 열어 사회모순을 봉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두 개 있었다. 일본 내 사회 변혁을 꿈꾸는 혁명 세력들과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장애물을 제거하는 작업은 동시에 진행되었다. 일본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 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천황을 암살하려고 모의했다는 이유로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1871~1911)에게 '대역죄'를 덧씌웠고, 이듬해에 당시 일본 혁명 세력을 대표했던 고토쿠 슈스이를 처형했다. 제국주의 열강 일제는 이로써 완성되었다.

군벌정권의 타파와 민주주의 확립이 혁명 사상이었던 시절에 저널리스트로서 자유민권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사회모순에 직면하여 의회정책 중심의 사회주의운동가 제1세대가 되었고, 이것이 내셔널리즘에 포섭되었다고 판단되자 이윽고 무정부공산주의라는 세계혁명 기획에 투신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린 메이지시대 말기의 혁명가 고토쿠 슈스이의 궤적을 떠올리면, 마치 식민지라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조선과 운명을 같이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조선의 식민지화를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학적 심성을 키우며 자유민권 운동가가 되었던 시절의 고토쿠는 민의에 기초한 입헌정치를 확립해야 왕도적인 이상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탓에 외교정책에서는 민의로서 국민의 이익에 합치한다는 점에서 종종 군사력 행사를 포함해서 조선을 일본의 세력권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등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공명하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계와 유착하여 부패한 정권과 의회를 지켜보며 절망한 그는 노동문제가 분출하던 19세기 말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 사회주의사상의 윤리적 측면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그는 '민'이란 더 이상 자본가나 정치가, 군벌과 같은 소수의 지배계급을 끌어안는 '국민'이 아니라, 그들 소수에게 착취당하는 다수의 '인민'을 가리키는 말로 규정하고, "소수의 욕망 때문에 다수의 복리를 빼앗는" 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로 바꾸지 않으면 도덕적 이상사회를 실현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인식의 대전환은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전쟁을 용인하던 그의 전쟁관을 바꿔 놓고 말았다. 그는 이제 전쟁의 원인을 경제적 경쟁에서 찾고 자본주의체제를 폐기해야만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신념에 입각하여, 러일전쟁 발발을 앞두고 대개의 지식인들이 개전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반전(反戰)론을 펴면서 1903년 평민사를 결성한다. 그때까지 강단에만 머물던 사회주의 세력들도 여기에 집결하여 비로소 현실의 사회 세력으로 결실을 맺는다. 이들은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것은 권력계급일 뿐이고, 인민 다수는 그 승패에 관계없이 생활과 자유를 파괴당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아가 교전국인 러시아의 인민들도 계급적 이익을 같이 할 뿐이며, 따라서 국경을 넘는 무산계급의 연대만이 세계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하여,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반전을 선언하며 세계 반전운동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러한 반전운동 속에서 고토쿠는 이윽고 조선의 인민들에게서 계급적 동질성을 발견하고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게 된다. 즉, 고토쿠가 조선에 대한 침략을 부정하는 데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회주의 이념을 획득하며 사상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 평화를 위한 사상의 전개

고토쿠 슈스이가 지은 한시가 새겨진
안중근 그림엽서(일본에서 발매금지된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제작된 것)

특히 1905년 러시아혁명 후, 보통선거에 기초하여 합법적인 의회 다수 확보를 목표로 하는 독일식 사민주의 의회정책론을 부정하고, 혁명 수단으로서 노동자의 단결과 총파업 등을 통한 사회주의 실현이라는 러시아식 직접행동론으로 사상적 전환을 이룬 후에는, 일본에 유학중이던 아시아의 혁명가들과도 활발히 교류하면서 그들에게 다양하고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아시아 인민의 계급적 연대야말로 전쟁을 막고 평화와 복리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여,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아시아 혁명가들의 민족 독립을 향한 열망을 오롯이 이해하는 데에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에 대해서는 당시 언론이 "손가락을 절단한" "잔인하고 흉포"한 "과대망상증 환자" 등으로 표상한 것과 달리, 살신성인한 유교적인 지사로 높이 기렸다. 고토쿠는 사회의 진보세력들에게 혹독한 탄압을 가하는 당시 일본 국가는 근대 입헌군주제 국가가 아니라 민권을 언제든지 제한할 수 있는 전제국가로 간주하였으며, 자기희생을 감행하는 안중근과 같은 지사는 덕정을 베풀지 않는 군주에 대한 혁명을 인정하는 유교 사상의 실천자로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일본은 동양 평화를 주장하며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을 사형하고 똑같은 동양 평화를 내세우며 한일강제병합을 강행했다. 그리고 일본 국가의 천황제 권력을 위협했다는 대역죄로 고토쿠 슈스이 등의 혁명가들도 국살(國殺)되었다. 일본 제국주의 체제는 외부를 식민지화하고 그에 대한 내부의 반대자들을 말살하면서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인물인 고토쿠 슈스이를 다시 불러내는 의미는 무엇일까. 필자는 전쟁도 불사하며 식민지 착취를 감행하는 국가의 범죄에 저항하고 애국심으로 선동된 국민을 상대화하면서 국가와 국민의 존재방식을 바꾸는 흐름 속에 스스로를 두고 제국주의와 군사주의에 대치했던 그의 횡적 연대를 통한 적극적 평화주의를 다시 한 번 음미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