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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어장을 지킨 독도해녀 이야기: 『독도해녀』를 쓰다
  • 김수희 독도재단 교육연구부장

독도 어장을 지킨 독도해녀 이야기독도해녀를 쓰다

 

김수희 독도재단 교육연구부장

 

 

영토주권의 상징 독도해녀

 

우리나라 전국에 많은 해녀들이 있지만 독도해녀는 특별하다. 영토주권의 상징으로 알려진 독도의용수비대와 독도경비대, 독도등대와 더불어 독도 수호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해녀에게 독도 어장은 생명의 원천이자 희망이었기에 악조건 속에서도 경비대 막사를 건설하였고 물자를 공급하였다. 그러나 독도해녀에 대해서는 독도의용수비대의 도우미’, ‘여성 노동자로 인식할 뿐 이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해방 후 일본 순시선이 침범했을 때 독도는 군사작전 지역을 방불케 할 정도로 위험했지만, 해녀들이 활동을 지속함에 따라 실효적 지배가 강화되었다.

독도의 현대사는 민중들이 독도에 거주하며 독도를 수호한 역사로 이루어졌다. 독도의 역사는 주로 울릉도 주민의 기억을 통해 찾고는 하지만, 이 책 독도해녀는 무엇보다 제주해녀들의 구술을 토대로 하고 있다. 언론 자료를 비교 분석하면서 독도해녀의 기억을 찾아 독도 수호의 역사적 의미를 검토했다.

 

사진1_ 『독도해녀』(동북아역사재단, 2023)

『독도해녀』(동북아역사재단, 2023)

 

 

독도 어장과 해녀

 

독도는 미역을 비롯한 다시마·대황·감태 등 해조류 군락군이 형성된 어장으로 전체 해조류의 70퍼센트가 미역과 감태였다. 특히 미역은 전통적으로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해조류로 원기 보양뿐만 아니라 산후와 제사 음식으로 이용되어 귀천을 막론하고 소비가 많았다. 소유되어 거래되는 미역 어장은 함부로 이용할 수 없는 소유권 어장이었다.

해방 후 동해안 어민들은 독도 미역 어장으로 진출해 활발한 어업 활동을 전개하였다. 독도는 미역 어장이자 최고의 오징어 어장으로 알려져 동해안 어민들이 이용하였다. 그러다가 195399일 한국수산업법이 발효되면서 독도 어장은 경상북도어업조합연합회 울릉도어업조합 남면 관할인 울릉도 남면어민이 소유하는 총유어장이 되었다.

이 시기 제주도 협재리 출신 이춘양 해녀를 비롯한 5명의 해녀가 울릉도로 도항하였고 독도에서 본격적으로 미역 채취 작업을 시작했다. 독도해녀의 잠수어업은 울릉도인의 채취 작업에 비해 능률적이어서 단기간에 많은 미역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 어장을 개발할 것을 결심하고 미역채취권을 교부받아 독도 어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독도의용수비대와 독도해녀

 

독도의용수비대 대장 홍순칠은 1954년 제주도에서 30~ 50명의 해녀를 모집하고 운반선 3척을 구비하였다. 미역어업은 현재 가치로 7천만 원 이상의 고수입을 올릴 정도로 부가가치가 높아 경제적 파급력이 컸다. 독도 어장의 가치가 부각되자 울릉도 주민들은 해녀를 적극 고용해 어장을 개발하였고 독도의용수비대를 비롯한 울릉도 주민들은 수호 의식을 높였다.

해녀들은 어업 기간 중 독도경비선으로 왕래하였고 독도경비대는 해녀의 도움으로 독도에서의 고단한 하루를 지낼 수 있었다. 만약 날씨의 영향으로 경비선이 오지 못하거나 접안이 불가능하면, 해녀들이 물과 식량을 조달하였고 잠자는 것부터 먹는 것까지 모든 것이 열악한 상황에서 서로 의지하며 생활하였다.

 

 

울릉도출어부인기념비독도의용수비대지원법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마을복지회관에는 울릉도출어부인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1956년 제주도 협재 주민들이 독도 해녀 37명의 업적을 기념해 세운 비석이다. 한편 국가는 2005독도의용수비대지원법을 제정하고 독도 수호에 전념한 울릉도인 33인을 국가 영웅으로 인정하고 추모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 해녀들도 이들과 함께 수호활동에 기여했지만, 그 업적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어떠한 평가도 하지 않고 있다. 독도의 현대사는 정부의 강력한 독도 수호정책과 이를 토대로 울릉도 주민과 독도해녀, 온 국민이 함께 지켜낸 수호의 역사임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사진2_울릉도출어부인기념비(1956, 제주도 협재부인회 건립)

울릉도출어부인기념비
(1956, 제주도 협재부인회 건립)

 

 

해녀의 생활사

 

독도로 도항한 해녀는 벼랑 밑에 천막을 치고 몽돌해변에 가마니를 깔아 생활하였고 물골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시며 살았다. 수십여 명의 해녀가 낫과 태왁을 들고 하루 종일 미역을 채취하였다. 아침에 해가 뜨면 모든 해녀가 바다로 나갔고 모든 생산물을 공평히 나누는 공동체 생활이었다. 독도 바다는 수시로 변해 큰 대풍과 높은 파도가 몰아쳤지만, 해녀에게는 단 한 번의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해녀들은 자신들을 보호하는 독도신령이 풍요로운 어장과 물을 내주고 보호했기에 한국의 땅이라고 말한다.

사진3_1953년 독도 입도 당시 박옥랑해녀

1953년 독도 입도 당시
박옥랑 해녀(뒷줄 정중앙)

 

독도해녀들은 지금도 풍요로운 어장의 기억에 행복해하다가 일본 순시선의 위협을 떠올리며 치를 떤다. 1953년경 독도에 도항한 박옥랑 해녀는 홍순칠 대장과 서도 물골에 살며 일본 순시선 침입에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그녀에게 독도는 삶의 지혜이고 삶의 고향이라며 치열했던 독도에서의 삶을 그리워했다

 

사진4_1959년 독도미역작업 기념사진

1959년 독도 미역 작업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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