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
한국에서 맞은 패전의 그날
김영숙 재단 한일연구소 연구위원
일본 문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清張, 1909-1992)의 이름이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그가 1944년 7월부터 일본 패망 후인 1945년 10월까지 ‘조선군’ 병사로서 용산과 정읍에 주둔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군대 시절
패전의 그림자,
그런데 “전쟁은 어디서 벌어지고 있는거야?”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한 것은 러일전쟁 중인 1904년 3월에 편성된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에서 시작되어 한국 식민지화 이후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 1918년에 2개 사단 상주체제를 갖추면서 ‘조선군’으로 이어졌다. 1943년까지 평시 약 6만 명을 유지하던 병력은 1945년 패전 시에는 24만 명으로 팽창되었고, 전황이 악화되면서 제20사단은 1943년 1월, 제19사단은 1945년 1월에 이른바 ‘남방(南方)’으로 투입되었다. 그 빈틈을 메운 것이 일본과 조선에서 징집된 일본인 보충병과 지원병 및 1944년 징병제 실시에 따른 조선인 병사들의 입대였다. 갑종 합격자만이 현역병으로 입대했던 중일전쟁 초기까지의 관례대로라면 징집 대상도 아니었던 제2을종 보충병 마쓰모토 세이초는 만 34세에 부모와 아내, 3남매를 남겨두고 입대했다.
세이초는 보병 제20사단 제78연대 보충대 소속으로 용산에 주둔하다가 1945년 2월 조선군 재편 후에 새로 편성된 제150사단에 소속되어 전라북도 정읍에 주둔하게 되었다. 미군이 1945년 1월에 필리핀에 상륙하고, 4월 1일에 오키나와에 상륙했지만, 조선에서는 공습을 당하는 일도 없었고, 연습이나 특수훈련도 없었다. 세이초는 장교들이 체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쟁은 도대체 어디서 벌어지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위생병이었던 그는 곡창지대라서 쌀은 풍부하지만 부식이 부족한 정읍에서 병사들이 아무 풀이나 먹다가 탈이 나지 않도록 식물도감에서 식용 들풀의 그림을 베껴 그리는 업무나 하고 있었다.
백제의 땅 정읍과 모악산 금산사
세이초는 훗날 소설 『빨간 제비뽑기』와 『현란(絢爛)한 유리(流離)』에 정읍에서 목격했던 일본 패전의 풍경을 묘사했다. 제150사단은 정읍의 농업학교를 접수해서 군의 막사로 사용했는데, 1945년 당시 정읍의 농업학교라고 한다면 1910년에 개교한 현재의 정읍제일고등학교를 말한다. 중위 이하는 농업학교 학생 기숙사에서 생활했지만, 대위 이상은 외부의 일본인 주택에서 하숙했고 사단장은 게이샤와 종업원이 있는 일본요리점을 숙소로 삼았다.
입대 전부터 고고학에 관심이 있었던 세이초는 정읍이 백제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알자 작은 언덕도 유심히 살폈고, 백제 때 창건된 모악산 금산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절의 당우(堂宇)는 거의 폐사나 마찬가지여서 기와에는 풀이 자라고 붉은 기둥은 곰팡이가 슬어 거무튀튀하게 변해 있었다. 처마를 받치는 두공(枓栱)은 흰개미가 갉아먹었고 바닥도 기울어 있었다”라고 자세히 묘사했고, “농학교 교정에서는 사택이 있는 지역이 빤히 보이고, 자주 산책하던 모악산 금산사도 시야에 들어온다”라고 정읍에서 멀리 떨어진 금산사를 굳이 사령부 지역 안으로 설정했다.
정읍공립농업고등학교 교문 앞(1942.4.18, 출처: 정읍제일고등학교)
운명의 그날과 패잔병들의 퇴각로
바로 그날, 1945년 8월 15일에는 천황이 직접 라디오로 무슨 발표를 한다고 부대원 전원을 사령부 마당에 집결시켰다. 병사들은 정면에 설치된 라디오 앞에서 받들어총을 하면서 귀를 기울였지만 잡음이 심해서 알아들을 수 없었고, 나중에 암호병들의 입을 통해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듯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사령부에서 잡일을 하던 한국인 군무원들의 태도는 다음날부터 대담해졌고, 방공연습을 하던 조선인들은 일장기를 개조한 태극기를 일제히 게양했다. 사단장과 참모장들에게 패전에 대한 그 어떤 공식 발표도 듣지 못한 채 총과 대검 등 무기를 모두 한국 측에 양도해야 했다. 한국 청년들은 일본군의 대검과 총을 차고 거리를 행진하는데, 일본군 사령부에서는 보초조차 무기가 없었다. 일본인들의 가옥에는 한국인들이 들어가서 거주하기 시작했고, 유력 인사들은 한국인들의 폭동에 대비해서 사령부에 보호를 요청했다. 일본군의 병기를 접수하기 위해 미군 장교단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세이초는 장교들이 일본인회 회장을 불러 미군들을 접대할 일본인 여성들을 차출하라는 것을 들었다.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듯했지만 그는 모파상의 『비계덩어리』를 연상했다.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 부대는 대체로 10~11월 사이에 귀국했는데, 150사단 사령부는 전선부대를 먼저 보낸 후 10월 11일에 정읍 거주 민간인들과 함께 마지막 열차로 출발해서 16일에 부산 도착, 같은 날 배로 일본 센자키(仙崎)항으로 귀국했다. 일본군이 남동 방면에서 제공(制空)·제해권(制海權)을 빼앗긴 탓에 본래 죽음의 전장 뉴기니에 파견될 예정이던 세이초의 부대는 한국에서 발이 묶였고, 다른 격전지와는 달리 단 한 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은 채 마쓰모토 세이초는 정읍에서 여느 날과 다름없는 일본 항복의 날을 맞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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