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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함(雲揚艦)의 조선 연해 정탐과 조일수호조규
  • 박한민 재단 한일연구소 연구위원

운요함(雲揚艦)의 조선 연해 정탐과 조일수호조규

 

 

 

 

2025, 120~15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 근대사 속 사건

 

2025년은 서기 연도의 끝자리 숫자가 5자로 끝나는 역사적 사건의 기념일이 많은 해다. 한국 근대사와 관련해서는 10년 단위로 1875년 운요함 사건, 1885년 톈진조약(天津條約),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과 을사늑약 체결 등을 꼽을 수 있다. 모두 조선의 대외 개방, 조선을 둘러싼 청국과 일본, 러시아의 역학 구도와 주도권 다툼,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150년을 맞이하는 것이 바로 강화도 일대를 무단으로 침입해 조선군에 대하여 무력 도발을 감행한 운요함 사건이다. 1875920일 운요함이 도발을 감행한 후,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사절을 파견하고, 1876227일 조선과 일본이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면서 문호개방을 하게 되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대중에게는 운요호(雲揚號)란 이름으로 더 익숙하지만, 함선의 성격상 군함이었기 때문에 운요함이 정확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1. 토마스 글로버 동상(출처 필자 제공)

나가사키의 토마스 글로버 동상(출처: 필자 촬영)

 

 

나가사키 주재 영국 상인 토마스 글로버의 운요함 발주

 

무력 도발을 감행한 운요함 선장의 이름, 함선의 이미지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운요함이 어디에서 건조되었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 조선 연안까지 진출하게 되었는지, 함선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운요함 사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에 도발을 감행한 사건의 정치외교적 맥락, 그 후에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의 성격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메이지 정부에서 조선에 파견하였던 군함 운요함은 1870년 영국의 스코틀랜드 에버딘(Aberdeen)에서 건조된 목재 증기선이다. 이 배는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재류하던 영국 상인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Thomas Blake Glover)가 야마구치번(山口藩, 현재의 야마구치현)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선박 제조회사인 홀, 러셀(Hall, Russell & Company, Limited)에 발주한 함선이었다. 주문 당시의 명칭은 운요마루(Wun Yo Maru)였으며, 이때 같이 주문한 일본 함선은 호쇼함(鳳翔艦)과 류조함(龍驤艦)이었다. 운요함은 돛이 두 개였고, 선박 길이는 약 38m, 폭은 약 7.5m, 배수량은 245, 106마력이었다. 운요함은 메이지유신 직후 있었던 일본 국내외의 병력 동원에 차출되기도 하였으며, 18715월부터 메이지 정부 소유의 군함이 되었다. 운요함을 영국에 주문한 토마스 글로버는 현재 나가사키 시내에 소재한 글로버 정원(Glover Garden)의 저택 소유주이자, 다카시마(高島) 탄광 운영자였다. 다카시마 탄광은 하시마(端島) 탄광(군함도)과 함께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 제철·조선·탄광산업)으로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또한 글로버는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가 창립한 미쓰비시회사(三菱會社)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이었다. 나가사키와 토마스 글로버를 매개로 운요함의 건조, 다카시마 탄광, 미쓰비시 등이 연결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눈여겨 볼 부분이다.

 

2. 글로버 정원에서 본 나가사키 시내 전경

글로버 정원에서 본 나가사키 시내 전경(출처: 필자 촬영)

 

 

운요함의 1차 조선 연안 정탐

 

운요함은 1875510일 해로(海路) 연구를 목적으로 출항하였고, 525일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함장은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 승선원은 전체 76명이었다. 613일 현석운(玄昔運)을 비롯한 조선 관리들이 운요함을 방문하였을 때, 운요함에서는 총과 대포를 발사하면서 함선의 위력을 의도적으로 과시하였다.

 

3. 운요함 사진 출전 『대일본제국군함첩』(해군문고, 1894) (★삽입 시 기울기 조정 필요)

운요함 사진(출처: 『대일본제국군함첩』, 해군문고, 1894년)

 

620일 부산에서 출항한 운요함은 동해 연안을 타고 위로 올라가 함경도 영흥부 지역에 이르렀다. 원산 지역에 도착한 후에는 항만과 하천을 측량하고, 지리와 풍토 조사 등을 실시하였다. 이때 운요함의 방문 목적을 파악하기 위해서 문정(問情)을 하러 나온 조선 지방관과 접촉하였다. 운요함 승선원들은 현지에서 본 조선인들에 대하여 우매’, ‘야만이라고 인식하였다.

627일 부산으로 돌아가던 운요함은 영일만(Unkovsky Bay)에 도착하였다. 여기서도 측량을 하고 병력 주둔에 편리한 곳을 탐색하기 위해서 사관들이 하선하여 뭍으로 올라갔다. 이들 일본인들이 온 목적을 파악하기 위해서 나온 지방관은 영일현감 김명구(金命求)였다. 김명구와 운요함 승조원들이 주고받은 필담 내용은 항해일지를 비롯하여 도쿄 니치니치 신문(東京日日新聞), 조선군기(朝鮮軍記)란 책자에 실려 대중에게 알려졌다. 이노우에 함장은 조선 지방관들이 절차에 따라 문정을 나온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1차 도한을 마친 후 나가사키로 돌아간 이노우에 함장은 조속한 출병 희망 의사를 해군성의 지휘부에 피력하였다.

 

 

 

운요함의 2차 도한과 무력 도발

 

1875912일 나가사키에서 출항한 운요함에는 조선 서해안으로 북상하여 청국 잉커우(營口)까지 가는 수로를 측량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920일 운요함이 강화도 인근 지역에 도달한 후, 이노우에 함장과 군인들은 보트를 타고 염하(鹽河)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강화도의 초지진에서는 무단으로 한강 하구까지 올라가려고 시도하는 선박을 발견하고 즉각 발포하였다. 이노우에 함장 일행은 소지한 소총으로 대응 사격을 한 후 저녁 9시 함선으로 복귀하였다. 다음날 아침 이노우에 함장은 조선 측에 대한 보복 공격을 감행하여 먼저 포격을 실시하고, 상륙하여 전투를 개시하고 항산도 포대를 점령하였다. 22일 오전에는 일본 군인들이 영종도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이고 대포 등의 노획물을 챙긴 다음 운요함으로 복귀하였다. 3일간 강화도와 영종도 일대를 공격한 운요함은 24일에 출항하였고, 28일 오전 나가사키로 복귀하였다. 이노우에 함장은 조선 내 전투 상황을 곧바로 해군성에 타전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운요함장의 보고서는 3일간의 전투를 하루에 있었던 일로 조작되었다. 이것은 대외적으로 일본 측의 피해 강조와 대응을 정당화하는 여론전에 활용되었다.

 

 

 

일본 사절의 조선 파견과 조일수호조규체결

 

운요함이 복귀한 후 일본 국내에서는 정한론이 다시 들끓었다. 일본 정부는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대표로 하는 사절과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한편으로 청국 전권공사로 모리 아리노리(森有禮)를 파견하여 청국 정부의 조선에 대한 입장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청국은 조선이 청국의 속방이지만 내치와 외교는 자주로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조선 정부는 신헌(申櫶)과 윤자승(尹滋承)을 접견대관으로 파견하여 일본 사절과 협상을 하도록 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 측이 제시한 초안(13개 조관)을 조관별로 검토하여 최혜국대우 조관을 제외시켰다. 227일 체결한 조일수호조규는 조일 양국이 자주국이자 평등한 관계로, 수시로 사절을 상대국 수도에 파견할 수 있도록 하였다. 20개월 이내 부산 외 두 곳의 추가 개항장 지정, 표류민 송환, 개항장 거류 상인들을 관리 감독할 관원의 파견 등도 규정하였다. 범죄인에 대한 영사재판 실시(10)는 동래 왜관에서 처리하던 방식과 같았으므로 별다른 이의 없이 수용하였다. 일본이 조선의 연해를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할 수 있도록 한 조관(7)은 청국이나 일본이 서구 열강과 체결한 조약에 없던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이 함선을 수시로 조선에 파견하여 연안을 측량하고, 정보를 수집하여 향후 조선 침략에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둔 것이다. 운요함의 무력 도발을 계기로 체결하게 된 조일수호조규에는 문호개방에 대한 조일 양국 내부의 인식 차이, 기존의 관행에 따른 조문 수용, ‘최혜국대우라는 불평등조약 요소의 배제, 연해 측량 허용 등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었다. 이후 조선은 1880년대 초반에 미국, 영국 등 서구 열강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교역을 확대해 나가는 길을 걷게 된다

 

4. 조일수호조규 제7관 연해측량 조항(출처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조일수호조규」 제7관 연해 측량 조항(출처: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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