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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람
병자호란 이후의 동아시아 세계와 조선
  • 장정수 재단 독도연구소 연구위원

병자호란 이후의 동아시아 세계와 조선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청에 복속되었다. 조선은 청이 중원을 지배하게 된 이후에도 만주족을 여진의 후예로 인식했고, 청이 중화의 적통이 될 수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러 청이 전성기를 구가하자, 조선인들의 인식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지속된 명·청의 전쟁과 조선

 

음력 163612, 조선에는 여느 해처럼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압록강부터 임진강까지 한양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지르는 4개의 강은 얼어붙었다. 이를 활용한 청군의 선봉대가 신속히 남하하자, 국왕 인조는 남한산성에 들어가 버텼다. 각 지방에서 올라온 근왕군(勤王軍)은 청군의 포위망을 뚫지 못했고, 믿었던 강화도 역시 함락되자 굳게 닫힌 성문이 열렸다. 1637130, 인조는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황제에게 항복했다.

 

1. 남한산성 서문(출처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남한산성 서문(출처: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병자호란은 명청 전쟁 중 하나의 국면일 뿐이었다. 조선과 명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큰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홍타이지는 가도(椵島)의 명군 소탕에 동참하고 추후 명나라를 공격할 때 군사를 내라는 조건을 약조에 포함시켰다. 정명전(征明戰)의 전황에 따라 조선의 향배가 변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청의 강압적 태도는 승리자로서의 자신감이 아니라, 조선에 대한 불신과 불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명의 멸망 직후, 조선군의 동원을 중단시킨 사실은 그 반증이다. 결국 조선은 명나라가 멸망하는 1644년까지 명청이 벌이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리고 조선

 

1644년 명의 멸망과 청의 입관(入關)은 조청 관계가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설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심양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 등이 귀국했고, 조선군의 동원도 중단되었다. 장기간 조선을 괴롭힌 피로인(被擄人) 쇄환 문제도 상당 부분 완화되었다.

한편, 조선의 반청 정서는 여전했다. 조선은 야인(野人)’들이 건설한 청이 명을 대신해서 중원을 장악해 가는 현실을 수용할 수 없었다. 조선은 오랑캐의 운수는 100년 이상 지속될 수 없다라는 인식하에 언제든 진정한 중화의 회복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인식은 북벌(北伐)’이라는 관념의 등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북벌은 실질적인 군사작전이라기보다는 중화의 회복에 호응하겠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청의 중원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명의 멸망 이후, 중국 남부에 건설된 남명(南明) 정권도 북벌의 근거가 되었다. 다만, 강한 의지로 군사력 강화를 추진한 효종도 북벌 의사를 드러내지는 않았고, 1662년 남명 정권도 소멸되었다.

1674삼번(三藩)의 난이 발생하자 조선에는 재차 북벌이 제기되었다. 이전보다는 선명한 논의가 오갔지만, 이를 주도하던 남인이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으로 실각하면서 동력을 잃었다. 1681년 삼번의 난이 종결되고 2년 뒤에는 대만까지 청의 수중에 들어가자 조선 내부에도 중화의 회복이 사실상 어렵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2. 존주휘편(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존주휘편(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청 질서와 조선의 중화 계승 의식

 

청의 중원 지배가 안정세로 접어들면서 조선은 중화의 회복 대신 중화의 계승을 추구하게 되었다. 중화 문물의 수호자를 자처한 것이다. 1704년 창덕궁에 건립된 대보단(大報壇)은 만력제(萬曆帝) 등 조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명 황제들을 모신 공간이다. 명의 멸망 이후 60년을 맞아 건립된 대보단은 조선이 명나라를 이은 중화 문명의 적통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의 중화계승의식은 중화 문물을 보호하겠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만주족의 청이 아니라, 중화 문물을 원형대로 간직한 조선이야말로 중화의 적통을 계승할 자격이 있다는 논리였다. 조선의 중화 계승 의식은 단순히 명에 대한 의리 차원에 그치지 않고 존주대의(尊周大義)’로 표방되었다.

존주대의의 표방이 중국을 자임한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자국의 유구한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고대사 인식도 강화되었다. 동시에 청과 만주족은 각각 피국(彼國피인(彼人)이라고 칭하며 다른 문화, 다른 역사로 구분했다. 병자호란 이후 청에 복속했지만, 조선은 오히려 자국(自國)의 정체성을 강화해 나갔다.       

 

3. 청태조 누르하치 동상(랴오닝성 푸순시 신빈현 소재)(출처 필자 제공)

청태조 누르하치 동상(랴오닝성 푸순시 신빈현 소재)(출처: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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