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에서 안중근을 만나다
하얼빈의 이국적 풍경과 러시아
하얼빈(哈尔滨)은 중국의 다른 도시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이국적인 유럽풍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하얼빈의 특산품으로 유명한 홍창(紅暢)은 러시아식 소시지이기도 하다. 이는 러시아가 19세기 말 연해주 일대와 만주 지역까지 확장한 것과 관련된다. 러시아는 1860년 블라디보스토크에 군항을 건설한 후 1880년대 후반 블라디보스토크-모스크바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하고, 1886년에는 청러밀약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을 경유하여 만주를 관통하는 동청철도(東淸鐵道: 1903년 완공)를 건설했다. 이어서 하얼빈-창춘(長春)-뤼순(旅順)에 이르는 남부 철도 노선을 추가함으로써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러일전쟁(1904~1905)을 거치며 이 지역 철도 운영권이 일본으로 넘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하얼빈은 여전히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남아 동청철도의 중앙행정 도시로서 교역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지속하였다. 현재 하얼빈의 이국적인 풍경은 러시아 문화의 소산이다.
하얼빈 모던 호텔(출처: 필자 제공)
성소피아 성당
이토 히로부미와 안중근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안중근은 을사조약 강제 체결의 장본인인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역에서 사살한다. 어떤 연유로 안중근과 이토는 한국도 일본도 아닌 제3의 공간에서 만나게 된 것일까.
일본은 러일전쟁 개전 직후 1904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하여 일본이 대한제국의 영토를 전략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을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킨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의 초대 통감으로 임명되어 대한제국의 일본 식민지화 정책을 강화한다. 이즈음 안중근은 의병운동에 가담하면서 항일 활동을 전개한다. 중국 연변 지역에서 항일 활동을 전개하던 안중근은 일제의 감시가 강화됨에 따라 1907년 10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의병 활동을 지속한다.
한편, 1909년 6월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병의 구체적인 절차를 완료한 후, 만주 지역에서 러일의 세력 범위를 조정하고 한일합병에 대한 러시아의 승인을 얻어내기 위해 10월 하얼빈에서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를 회견하기로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안중근은 이 소식을 듣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안중근은 22일 하얼빈에 도착하고, 신문 등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의 동선을 확인한 후 26일 아침 하얼빈역에서 일본인들 속에 섞여 이토를 기다린다. 특별열차에서 코코프체프와 회담을 가진 후 이토가 내리자 그를 향해 세 발의 총알을 발사한다. 곧 러시아 병사에게 체포된 후, 일본 검찰관에게 인계된다. 이후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한다.
의거 준비부터 순국까지
안중근 의사 기념관
하얼빈역 남문 한 켠에는 구 대합실을 개조해서 조성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위치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31세의 젊은 안중근 동상과 마주하게 된다. 그 옆으로 복원한 기차역 철문을 통해 전시실로 들어가게 된다.
기념관 전경
안중근 동상
전시는 안중근의 ① 출생과 성장, ② 구국계몽운동, ③ 의병투쟁, ④ 하얼빈 의거, ⑤ 법정투쟁, ⑥ 불후의 유언, ⑦ 저술과 유묵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계획부터 실행까지 사진과 패널, 일부기록물 등을 이용하여 날짜별로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으며, 모든 패널은 중국어와 한국어를 병기하여 한국인의 내용 이해를 돕고 있다.
한편 전시의 중간 기차역 플랫폼과 맞닿은 공간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위치를 바닥에 표시하였고, 창문을 통해 보이는 기차 플랫폼에는 실제 저격 위치가 바닥에 표시되어 있어 당시의 생생한 광경을 느낄 수 있다.
철문
안중근 유서 내용
안중근 의사의 의병 활동에 대한 전시 패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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