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 시기까지 한국과 중국, 일본은 한자와 유교문화를 공유하는 이른바 '동문(同文)세계'로서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였다. 오늘날에도 경제공동체, 문화공동체, 가치공동체로서 '동북아공동체' 담론이 활발하다. 과거 역사를 생각해 보면, 동북아시아는 어느 지역보다 공동체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좋은 조건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 반대다. 현재 동북아시아에서 유럽연합(EU)이나 아세안(ASEAN) 같은 지역공동체 구축은 요원하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과거사와 영토문제 때문에 당사국 사이 갈등이 위험수위에 육박하고 있으며, 우발적인 계기로 무력 충돌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 모두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고, 세 나라 정상은 모두 전후세대로 비슷한 연령대라는 공통점이 있다.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만나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위한 건설적 의제를 교환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정상은 새 정부 출범 1년이 지나도록 아직 정식 정상 회담을 하지 못하였다. 양국 관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며, 국민들의 상호인식도 악화일로다.
2015년 6월 한일 양국은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한다.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야 하는 중요한 분기점에서 양국은 발전적인 모멘텀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현해탄의 파고는 어느 때보다 높고도 거칠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나빠진 원인은 양국 모두에게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반한여론이 고조된 계기는 2012년 여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뒤이어 일본국왕에게 사죄를 요구한 것,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격하하는 발언 등 이른바 '3종 세트'를 들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 과거사 문제에 강경하게 발언하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도 일본인들은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갈등의 가장 큰 책임은 변동하는 국제정세에 적응하기를 거부하고 거꾸로 질주하는 일본의 일부 정치세력에 있다고 생각된다.
일본 일부 정치인들의 빈곤한 역사인식
오늘날 일본은 수준 이하의 담론과 행동들이 횡행하는 상황에 있다. 아베 신조 일본총리를 필두로 연달아 이어지는 일본 정치인들의 발언은 무척 실망스럽다. 최고위 정치인의 역사인식이 이 정도로 천박할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발언과 행태를 보면서 일본의 국력과 국가 품격이 하락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본은 오랫동안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라는 지위를 유지해 왔으면서도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리더십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전후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전후 '신생 일본'은 아시아인에게 속죄하는 것에서 출발하여야 했지만, 그 과정이 생략되었다. 일본은 미국에게 항복하는 뜻을 표하면서도 침략을 받았던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죄책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패전 직후 미국에 의한 타율적 개혁, 냉전체제로의 돌입이라는 상황이 일본의 주체적인 역사인식과 자기성찰을 불분명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실상을 말한다면 일본은 미국의 논리에 편리하게 순응하면서 아시아에 대한 책임에서 도망쳤다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본래 탈아론적 아시아관과 대동아공영권 같은 사고방식에서는 아시아에 사죄해야 한다는 발상은 나올 수 없다. 심지어 한국에 대한 패전의식도 없었다. 일본은 미국과 전쟁에 져 한반도를 '상실'했을 뿐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책임 문제가 빠진 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전후 일본의 보수파들은 꾸준히 '패전'과 침략전쟁 자체를 부인하여 왔다. 특히 전후세대들에게는 식민지 지배와 같은 과거사는 자신과 상관없는 문제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이들에게는 '전전(戰前) 세대'들이 지녔던 일말의 원죄의식마저 거의 사라졌다. 이는 전후 일본의 역사교육 결과이기도 하다.
냉철한 머리로 전략적 대응을
그러면 현재의 상황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이며 해결을 위한 방안은 어떤 것일까?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뿌리가 깊다. 갈등의 바닥에는 서로에 대한 인식차가 있고,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차도 있다. 그동안 양국 관계는 차분한 이성보다는 '국민정서'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내셔널리즘을 부추기는 감정 대응은 문제 해결보다 심리적 거리만 더 할 뿐이다.
양국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야말로 숙명적 이웃이다. 현실에서 북한의 핵위협에 대한 대처, 남북통일 등 공동이익을 위해 협력해야 할 일이 많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상황에 냉정하게 대처하면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전략적 대응을 해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역사문제에 관해 일본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 문명사회의 보편기준에 따라 유엔과 미국, 유럽 등 국제사회에서 공개적으로 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일본인들은 그동안 한국, 중국의 여론은 무시하는 경향을 보여 왔지만 서방세계의 동향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해탄을 사이에 둔 현재 기류를 일과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따라서 일본 정치인의 발언과 행동에 과민반응하기보다는 멀리 내다보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베정권의 국수주의 행보에 대한 국제사회 비판이 이제 국민들에게도 알려져 지식인과 시민사회의 비판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일은 앞으로 더욱 확산될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시민사회와 양심 있는 지식인들과 공감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깨어 있는 시민끼리 연대하여 양국 정부를 끌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며 효과적인 방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