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의 저변이 구미학계로 확장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지만, 중국학이나 일본학에 비해 여전히 열세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두 분야에 비해 연구자가 적을뿐더러 연구의 깊이 역시 아직은 미흡한 부분이 적지 않은 실정이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재단은 창립 초기부터 구미학계에 우리의 새로운 연구성과를 알리고 관련 연구내용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힘을 쏟아왔다. 각 분야의 연구위원들을 구미학계의 각종 학술회의에 참가시켜 역사문제를 논의케 하고 영어권 독자를 위해 우리의 연구성과를 번역하여 발간해 왔던 것이다.
이번 AAS 참가도 이러한 취지에서 기획되어, 광개토왕의 패널 발표팀과 재단 발간 도서의 부스 설치를 위해 출판팀이 참가하였다. 이밖에 구미학계와의 공동연구 협의와 구미권 도서관과의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관련 업무의 담당자들이 참가하였다.
광개토왕비는 발견된 지 100여 년이 지났고, 비문의 내용 가운데 왜(倭)에 대한 기술도 있어 구미학계에도 익히 알려진 자료이지만, 작년 지안고구려비(集安高句麗碑)가 공개됨에 따라 새로운 의미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관련 문제에 대한 새로운 연구는 재단의 연구위원들을 비롯해 우리 학계가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한 발표 주제("Koguryo Stele Inscription: As Historical Sources")였다. 그렇기 때문에 재단 연구위원만으로 발표진을 구성했지만, 패널 구성에 필요한 사전 심사를 별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구미학계에 우리 연구 소개할 때 유의할 점
패널 발표는 3월 29일(토) 오전 첫 시간에 열렸다. 이른 시간이라 청중이 적지 않을까 싶었지만, 예상외로 많은 이들이 1,600년 전의 고구려비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발표한 세부 내용은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고구려 건국신화와 수묘인(守墓人) 문제와 세계사적 관점에서의 광개토왕비의 역사적 의미 그리고 고구려의 문자 문화 등에 관한 것이었다. 발표 내용은 고구려사를 전공하거나 한국사에 대해 해박하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어서, 청중들에게 광개토왕비의 사료적 가치를 충분히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중들이 다양한 질문을 하며 보여준 반응이 이를 방증한다. 다만 청중의 질의를 통해 구미권 학계에 우리 연구를 소개할 때에 유의해야 할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기술해야 한국사의 독창적 측면을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다. 예컨대 시조가 알에서 태어나 신이한 행적을 보인 고구려의 건국신화는 고구려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사료인 동시에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퍼져있는 여러 난생설화와 연결되는 것이다. 또 왕릉을 지키는 묘지기에 대한 부분은 광개토왕비문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내용이지만, 동시에 고대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 사례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동아시아적 배경을 설명하고 이를 전제로 하여 상호 비교·검토를 한다면, 구미학계 연구자들이 비문 내용의 특이성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데 더 수월했을 것이다. 구미학계가 중국사나 일본사를 더 많이 알고,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하여 동아시아사의 보편성 속에서 한국사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주제를 선정하고 내용을 설명해 가는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물론 동아시아사적 관점을 적용할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재단 연구위원들의 발표 외에 몇 군데에서 한국사를 주제로 한 패널 발표가 있었는데, 그 중 한 곳은 최치원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최치원은 당나라 유학생 출신이라는 점에서 한·중·일 학자들이 공동 연구주제로 삼을 만한 인물임에 분명하다. 또 그러한 측면에서 패널 발표를 기획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당나라 유학생 출신이라는 그의 성장과 지적 배경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자칫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 대한 오해를 불러올 우려가 있는 발표 내용도 보였다. 이러한 주제는 구미학계가 여전히 당시 국제관계를 당과 그 주변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다루었어야 할 주제로 보였다. 이 문제는 앞에서 설명한 접근 방식과 함께 구미학계를 상대로 우리 연구성과를 소개할 때 미리 검토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여겨진다.
재단 활동 소개를 위한 기획 필요
한편 조선왕조실록을 주제로 삼은 패널 발표는 여러 면에서 흥미로웠다. 이 패널은 국사편찬위원회가 꾸린 것으로 자신들의 사업 내용과 발표를 연계시킨 것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실록을 영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 패널 발표로 자연스럽게 해당 사업 내용을 구미학계에 알리는 효과도 얻은 것이다. 이처럼 AAS와 같은 국제 학술계에 우리 역사를 알리는 것에서 한걸음 나아가 재단의 활동상을 소개하는 기획도 필요해 보였다.
국내에서 매년 열리는 역사학대회처럼 AAS에는 한국학 관련 도서를 출판하는 출판사들이 마련한 다양한 부스가 설치되었다. 재단은 지난 2010년부터 재단 발간도서를 전시하는 부스를 마련해 왔는데, 이제는 제법 지명도가 높아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방문객들이 재단 부스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전시 도서에 관심을 보였을 뿐 아니라, '동북아역사넷'에 개설된 영문판의 내용에 흥미를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재단이 계획하고 있는 '케임브리지판 한국사'와 '중세 한국사'를 집필하는 문제에 대한 협의도 기대한 것 보다 큰 호응을 얻었다는 점에서 성과가 있었다. 구미학계의 한국사 연구자를 대표하는 존 던컨 교수(UCLA)와 도널드 베이커(British Columbia) 교수 등이 영문판 한국사가 필요하다는 점에 깊이 공감하며 적극적인 협력 의사를 밝혔다. 다만 구미권의 한국사 연구자층이 엷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당장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인다. 이제부터 재단은 충분한 검토를 거쳐 기획안을 마련해야 할 것인데, 이번 협의로 그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