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사이의 국경은 정치적 측면에서 권력과 주권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제한하고, 경제적으로는 인적·물적 유동과 교류의 장벽으로 기능한다. 이처럼 국경은 분리와 단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타자와 접촉하고 접합하는 시작점이라는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따라서 상이한 국가의 법·제도적 권위가 개입하는 두 개 이상의 행정적 권역을 포함하는 접경지역은 각 국가 중앙정부의 정책 효력이 미치지 못하는 변두리의 낙후지역이나 또는 국가 사이의 첨예한 이익이 충돌하는 분쟁과 갈등의 장소로 인식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접촉과 교류라는 국경의 특징이 강조될 경우 새로운 혁신과 성장이 가능한 공간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정보통신과 교통의 발달, 그리고 세계화가 진전하면서 장벽보다는 접촉이 이뤄지는 장으로서 국경 기능이 강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 여러 접경지역에서는 해당 지역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한 다각적인 초국경 협력을 통하여 주변부에 불과했던 접경지역을 새로운 성장거점으로 삼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안정과 번영의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협력의 공간으로서 국경과 변경 재조명
『동아시아 평화와 초국경 협력』은 바로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접경의 가능성에 주목하여 진행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 프로그램의 주요 성과물이다. 재단은 지난 2009년부터 한국, 중국, 일본의 연구자들과 함께 동아시아 평화와 초국경 협력에 관한 학술회의를 연례 개최하여 동북아 각국 지식인들의 지혜를 모아 관련 연구의 이론적 도약과 정책사례 발굴을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 왔다.
국경과 변경의 의미와 기능이 새로이 조명받고 있는 상황에서 전략적 관점과 새로운 발상으로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러시아의 접경을 공생하는 초국경 협력의 공간으로 설계하고 구축하려는 연구기획 의도와 지향이 책에 잘 반영되어 있다.
먼저 책에서는 "동아시아 평화와 한반도 통일 그리고 북중 변경에서의 협력"(홍면기), "베스트팔렌체제를 넘어 동아시아 공동체로"(딴싱우), "변계지역 국제협력과 변연문화구역의 전략적 가치"(김강일), "중국 변강이론의 진화와 공동이익 변강 개념의 발전"(박장배) 등의 논의를 통해, 동북아의 역사적 맥락과 제도에 기초하여 초국경 협력의 의미와 변경에 대한 이론적인 변화를 정리한다. 와다 하루키 교수는 초국경 협력이 동북아 공동체 논의와 국경을 넘나든 민족의 역할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초국경 협력의 주요 사례와 관련 이론이 주로 유럽통합 등 서구의 경험과 맥락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같은 논의가 동북아 초국경 협력 이론에 기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유럽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동아시아 지역협력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는 연구(이규영)는 동아시아 초국경 협력 요건을 파악하는 중요한 비교의 틀을 제공해 주고 있다.
구체적 초국경 협력 정책 모색
이 책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동북아에서 이뤄진 초국경 협력의 실제 사례에 기초한 구체적 정책 제언 등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북중 간에 이뤄지고 있는 접경협력은 이전 북한 경제특구 사례와는 달리 양국의 전략적 이해에 기초하여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양국의 전략 추이에 대한 면밀한 탐색으로 북중 접경협력의 성공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중국 서북·서남·동북지역에서 이뤄지는 접경협력 사례를 검토하여 중국 초국경 협력의 현황과 과제를 점검하고 있는 이동률 교수의 연구는 접경협력으로 변경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중국의 전략적 이해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한편, 북중 접경지역은 한반도와 대륙을 잇는 요충지다. 철도, 도로, 공항 등 대규모 SOC 투자와 도시건설, 환경보호 분야에서 여러 나라가 경제분야에서 협력하는 기회도 늘어날 것이다. 이를 통해 침체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세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새로운 성장거점이 탄생하기를 기대할 수 있다. 역사적 고찰을 통해 동북아 경제·물류 네트워크 중심지로서 연변지역의 역할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탐색하고 있는 논문(김석주)과 중국 두만강지역협력개발 계획과 조선족의 역할을 다루고 있는 이바오중의 연구는 북중 접경협력 지대에 대한 공간 이해와 활용을 위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북중 접경협력으로 북한의 대외개방 폭과 심도는 점차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접경지역의 연계개발을 계기로 양국 경제협력이 한층 깊어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북한과 중국 동북3성, 그리고 러시아 사이에 운송과 물류 연결, 자원 공동개발과 활용이 실현될 경우 접경지역 북한 도시들의 경제활동과 산업생산에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은 물론 국제사회와 교류도 늘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북중 접경에서 초국경 협력의제로 녹생 성장을 제시하고 있는 글(추원서)과 한국과 중국 젊은이들이 양국간 우호협력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답사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는 연구(김주용), 두만강 개발 계획과 남한과 북한, 러시아 가스관 연계 사업 논의(임을출) 등은 이미 눈에 보이는 동아시아 초국경 협력 프로젝트와 그 추진 전략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책적 논의를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아시아 평화를 이룰 유력한 접근법이자 내용인 접경지대의 초국경 협력을 다루고 있는 연구 프로그램의 결실인 이 책의 학술적·정책적 의의는 상당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동아시아 초국경 협력과 평화 실현을 위한 재단의 역할이 지속되어 관련 연구 성과가 차곡차곡 쌓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