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공공외교 분야에서 최고 인기품목은 무엇일까? 언론에는 한식 세계화가 단연 눈에 띄는 품목이다. 그러나 실제 외교현장에서는 몇몇 선진국을 제외하고는 단연코 새마을운동이 대표 선수다. 폴란드 바르샤바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폴란드에서 역사화해가 새마을운동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폴란드인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다른 나라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역사화해인 것이다.
미국의 카터 정부에서 안보담당 보좌관을 지낸 브레진스키(Brzezinski)는 폴란드 출신이다. 일본의 역사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자신이 폴란드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3월 11일, 바르샤바에 도착한 다음날 독일 홀로코스트의 상징인 아우슈비츠를 찾았다. 패망 직전 독일이 파괴했다고 하는데 그 잔해만으로도 규모와 잔혹함을 잘 알 수 있었다. 5년간 1백30만이 수용되었다가 학살되었고, 그 중 15만이 폴란드인이었다. 기념서점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독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저는 독일 싫어요" 하며 웃었다. 오묘한 대답이다.
바르샤바 시내에서 제일 높게 우뚝 서 있는 건물은 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이다. 기념품 가게에서 마그네틱으로 팔고 있는 것을 보면 바르샤바의 랜드마크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시내 한공원 무명용사비 앞에서 외국 학생들에게 침을 튀기면서 설명을 하던 가이드가 멀리 보이는 그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장 없애야 할 건물이다." 스탈린이 위성국들에게 선물을 빙자해 하나씩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그 순간 서울의 중앙청이 떠올랐다. 지금은 없어진 옛 총독부말이다.
"역사는 바뀔 수 없지만, 역사기억은 바뀔 수 있다"
'한·폴 역사화해 세미나'는 자못 진지했다. 참석자들 대부분이 가해자인 일본이 사과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보다는 역사화해를 위해서는 서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 독일 학자는 역사는 바뀔 수 없지만, 역사기억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인식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폴란드-독일화해재단의 전 이사장은 상대방이 사과하게 하려면 받는 사람의 신호가 중요하다는 점과 한일 화해를 위해 양국대화가 어려우니 폴란드와 독일이 함께하는 4개국 학자들 대화체에서 출발하는 방법을 권유하였다.
마지막 날 오전, 공항으로 가기 전, 복잡한 머릿속을 풀어볼 겸 바르샤바 시내 중심지를 돌아보았다. 복원한 구도시도 구경하고, 제2차 세계대전시 항전기념비도 둘러본 뒤, 획일적이며 딱딱한 사회주의 도시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바르샤바를 뒤로 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뭔가 허전한데, 이건 뭘까? 인천공항에 도착해서도 그 허전함이 그치지 않았다. 며칠 뒤, 아차! 브란트 수상이 비오는 날 무릎을 꿇었다는 그 게토투사 기념비를 빼먹었다. 급히 구글 지도를 찾아보았다. 이런, 우리가 지나온 항전 기념비 길 건너편에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