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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전봉준, 1894년 동아시아 변동의 중심에 서다
  • 유바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원

올해로 120주년을 맞는 동학농민혁명은 안으로는 봉건 지배체제를 타도하고 밖으로는 일제의 침략에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일어난 거대한 움직임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 전봉준이 있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의 개시에 앞서 1893년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 외세 배격을 골자로 한 '척왜양(斥倭洋)'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894년 1월 자신의 근거지였던 전라도 고부에서 농민봉기를 일으킨 다음, 같은 해 3월 전라도 무장에서 손화중과 합세하여 포고문을 발포하고 동학농민혁명을 본격적으로 개시한 장본인이었다.

전봉준은 1855년 전라도 고창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태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조선이 서구 열강과 직접 접촉하거나 충돌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청국은 이미 1842년 아편전쟁의 패배에 따라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하여 중화 중심의 세계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조선은 두 차례의 양요를 치른 뒤 1876년에 일본의 개방 압력에 따라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이후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와도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일본, 청국을 중심으로 한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1885년, 영국이 조선의 거문도를 점령하고 조선 내부에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전봉준은 20~30대 청장년기에 이런 상황을 목도하고 있었다. 그 역시 외세의 침탈을 조선의 위기로 보았기 때문에 1892년 동학에 입도하여 반외세 운동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은 서학에 대한 대결의식의 소산으로 창도된 종교단체였던 점을 주목해 전봉준은 정치적 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던 흥선대원군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대원군이 대표적인 외세 배격론자였기 때문에 연계를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척왜양' 운동을 주도하여 변혁 세력을 결집하다

1892년 말엽부터 동학교단을 중심으로 일어난 교조신원운동은 처음에는 동학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 달라는 종교운동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전봉준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외세 배격을 골자로 한 '척왜양' 구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를 중심으로 변혁지향세력이 결집되기 시작하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형상화한 기록화

이 당시 나타났던 '척왜양' 구호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너희들은 조속히 짐을 꾸려 본국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충신의 갑주와 인의의 방패로써 죄를 물어, 오는 3월 7일에 토벌할 것이다", "지금 왜양의 적이 심복에 들어와 대란이 극에 달해 있다. 우리들 수백만은 힘을 하나로 하고 죽음을 맹세해서 왜양을 모두 물리쳐 대보의 의리를 다하고자 한다" 등의 구호들이었다.

열강은 경악하였다. 영국과 독일이 인천에 정박한 군함 활용을 검토하였으며, 일본은 거류 부녀자들의 철수를 준비하였다. 청국도 순양함 두 척을 인천에 파견하였다. 청일전쟁 발발 1년 전 이미 조선은 동아시아 정세를 혼동으로 몰아넣는 중심으로 떠올랐다. 청일전쟁은 이미 1893년 단계에서 예비 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금치 전투 패배 후 일본의 동아시아 석권과 민중 학살

1894년 3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기포(起包)한 동학농민군은 4월 고부 황토현 전투, 장성 황룡 전투에서 전라감영군과 정부군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4월 27일 전라도 전주를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청군을 불러들였으며, 일본은 제물포조약과 텐진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출병하였다. 1894년 6월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남양만에 위치한 풍도서 청국군함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척왜양'을 기치로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하였던 전봉준은 일본군의 조선 침략을 좌시할 수 없었다. 9월 재차 기포하여 동학농민군을 결집시킨 전봉준은 11월 충청도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 및 이에 합세한 관군과 접전을 벌였다. 이 당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에서만 10,000여 명이었고, 이를 막기 위한 일본군은 후비보병 제19대대 산하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 대위가 지휘하는 1개 중대 200여 명, 관군은 우금치에 근접한 부대 경리영병 280명이었다. 병력면에서는 동학농민군이 많았으나 근대적 중화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을 당할 수 없었다.

우금치 전투 패배의 여파는 컸다. 일본군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의 "모조리 살육하라" 명령이 떨어지면서 동학농민군에 대한 대대적 학살이 이어졌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전봉준이 주력 부대를 해산한 후에도 동학농민군의 전투는 이어졌으나, 전라도 장흥, 충청도 보은 등에서 모두 일본군과 관군에게 살육당하고 말았다. 일본군의 살육은 조선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이미 평양전투와 황해해전을 고비로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분명해졌지만, 후방에서 동학농민군까지 물리친 결과 이제 일본군은 더 이상 배후를 염려할 필요 없이 압록강을 건너 청국 경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때 일본군이 일으킨 뤼순대학살은 동학농민군 학살을 방불케 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문명 일본'과 '야만 청국'의 대결로 선전하였지만, 막상 야만성을 드러낸 것은 그들이었다.

1895년 4월 17일(음력 3월 23일) 시모노세키조약이 일본과 청국 사이에 체결되면서 청일전쟁은 끝났다. 이로써 중화 세계질서는 완전히 무너졌으며 이제 동아시아 세계는 일본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직후, 3월 30일 일본 영사까지 심문에 참여한 재판에서 전격 단행된 전봉준의 처형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 최종적으로 압살당했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