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세 나라, 한·중·일은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다양한 교류를 통해 서로 협력하기도 하였지만 엇갈린 이해관계와 국제 정세에 따라 갈등과 대립을 거듭하기도 하였다. 시대의 요청으로 '동아시아 공동체 구현'을 희망하면서도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은 미미하였다. 동북아역사재단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동아시아의 교류와 소통을 위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동북아해양평화벨트 구축사업'을 실시하였고 해당 전문가들이 현지를 집중조사하고 관련 문헌을 검토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중 중국 랴오둥·산둥반도 지역에서 벌어진 국제전과 근현대사 관련 유적을 통해 전쟁의 기억과 기념 방식을 분석하고 이를 평화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 결과물이 바로 『중국 랴오둥·산둥반도 국제전 유적과 동북아 평화』다.
랴오둥·산둥반도에 남은 전쟁 기억을 찾아서
전쟁 기억은 두려움과 죽음으로 표상되기 때문에 오히려 생명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민족이나 국가를 위한다는 '타자를 위한 거룩한 죽음'은 성스럽고 영광스런 모습으로 박물관이나 기념관을 장식하고 역사에 아로새겨져 역사 기억을 재생산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한다. 전쟁은 흔히 '승자의 영광'과 '패자의 치욕'으로 끝나지만, '패자의 치욕'은 설욕을 다짐하도록 하여 또 다시 '승자의 영광'을 꿈꾸는 전쟁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물론 전쟁이 승자의 영광과 패자의 치욕만 있다면 단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승자도 패자도 없이 치욕만 덩그러니 남아 무엇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지도 이해하기 힘든 역설에 빠지기도 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라는 명칭 어디에도 '한반도'는 없다. 한반도는 두 전쟁이 발화한 곳으로 승자와 패자가 줄다리기를 벌이는 동안 상처를 입은 피해자인데도 이런 사실을 국제사회가 제대로 인정한 적도, 학술적으로 규명된 적도 없다는 역설에 빠져 있다. 특히 중국 중심의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한 청일전쟁과 뒤이어 발생한 러일전쟁은 전쟁의 직접 당사자인 청과 일본, 일본과 러시아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 따라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전쟁 당사국으로 좁혀 볼 것이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를 함께 살펴야 그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먼저 랴오둥과 산둥반도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랴오둥과 산둥반도는 중국, 일본, 러시아, 한반도 등 동아시아 교류가 매우 활발한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독일이 산둥반도를 장악하여 동서 교류가 이루어진 지역이다. 따라서 청일·러일전쟁과 관련 있는 역사유적지와 시설물을 현장 조사하여, 그 위치와 구조 등을 살피고 유적지가 역사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분석하였다. 유적지 설명문의 내용을 채록하여 거기에 녹아 있는 학술적·역사적 의미를 파악하고 중국이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그들의 역사인식이 어떠한지 이해하는 데 주력하였다.
동아시아 화해 구축을 위한 역사 유적지 활용 방안 모색
또, 기념관의 전시물이나 설명문에서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찾는 데 관심을 두었다. 전쟁이 발생했던 배경과 원인을 규명하고 이를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미래 동아시아 여러 국가와 민족이 공존하고 공영하는 길을 찾는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랴오둥반도와 산둥반도에 남아 있는 장보고 활동이나 항일독립운동 등 한국사 관련 역사유적지와 칭다오의 독일 관련 역사 유적지도 조사하여 동아시아 안에서 교류뿐만 아니라 세계 교류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전적지를 탐방하여 현장을 조사하는 방법과 문헌자료(연구논문, 연구서적, 자료집, 사진첩, 회고록, 수기, 증언, 관련 신문·잡지기사 등)도 동시에 참고하여 이론과 실제가 괴리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동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전개된 청일·러일 전쟁에 관한 동일한 전쟁유물과 유적지를 두고도 두 나라는 시대와 주체에 따라 정반대의 평가를 기반으로 역사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현실은 동아시아에서 상호 교류하고 협력을 확대하는 데 과연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현존하는 유적지와 유물은 동아시아가 화해하고 평화지대를 구축하는 데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인가? 근대 동아시아 전쟁 유적과 유물들을 미래를 생각하며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는 없을까? 동아시아 국가와 민족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평화지대를 만드는 데 역사유적지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걸까?
과거 역사를 자기중심으로 기억하면서 생긴 오해를 불식하고 서로 이해 가능한 역사관을 공유하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동아시아가 더불어 공생하고자 한다면 그 방안 찾기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이와 같은 물음에 관해 다시 질문하고,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현실적이고도 사실적인 인프라를 구축하는 방안을 찾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었다. 따라서 동아시아 역사인식의 차이를 극복하고, 공통점을 마련하기 위한 기초로서 역사 유적지를 탐방할 때 유용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책과 대조해 가면서 유적지를 탐방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한다면 새로운 동아시아 시민사회와 의식 있는 청소년층을 양성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연구 프로젝트 외에 동아시아 상호 교류의 실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좀 더 구체적인 교류와 소통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 준다면 더 없이기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