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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고 김학순, 삭제와 왜곡 사이에서 진실을 이야기하다
  • 박정애 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

199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김학순'은 뇌리에 콕 박혀 있는 이름이다. 한국인 최초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자, 고 김학순. 1991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 14일, 고 김학순이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 생존자임을 밝힌 그날부터 한국사와 동아시아사, 나아가 세계사는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새롭게 쓰기 시작했다. 전쟁과 식민지 가해와 피해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성적 피해자가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며 '그 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충격이었고, 그날 이후 한국과일본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어"졌다.

우리에게는 '김학순 할머니'가 더 친숙한 호명이겠지만, 이 글에서는 '김학순'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일본군 '위안부'가 된 후 여성으로서 삶을 잃은 '위안부 할머니'라는 담론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 '위안부' 이후에도 계속 삶을 이어온 한 여성의 생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작은 시도다. 우리는 종종 소녀와 할머니 사이에 존재했을 '위안부' 피해 여성의 삶을 잊어버린다. 대면하기가 괴로워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 생존여성의 삶 전체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고통의 결들 속에 '위안부 할머니'가 지닌 생존력의 원천이 배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학순이 부여받은 '최초'의 의미는 그 고통의 결들을 스스로 헤쳐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더욱 묵직하다.

'위안부' 피해자 이름 너머의 삶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일본이 패전한 뒤 5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사회의 담론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문제에 얽힌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성적 피해여성의 피해보다는 '정조 훼손'에 초점을 두는 관점, 성적 피해자의 행실을 더욱 따지는 태도들, 당연한 듯이 이어지는 2차 성적 공격과 주위의 냉담한 반응들. 따라서 성적 피해자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특별한 용기와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김학순의 부모는 중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1924년 김학순을 낳았다. 김학순이 태어난 지 백일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는 다시 평양으로 들어왔다.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기도 했던 김학순은 어머니가 재혼한 후 적응을 하지 못해 가족들과 갈등을 겪었다. 열다섯 살 때 기생집(기생을 기르는 집) 수양딸로 보내졌고, 1941년 17살 때 새아버지를 따라 중국 베이징으로 갔다. 중국에서 김학순은 군인들에게 어딘가로 강제로 끌려갔다. 트럭을 타고 끌려간 일본군 부대가 있는 곳에서 '그 일'은 시작됐다.

김학순은 넉 달 만에 조선 남자를 만나 위안소를 빠져나와 남매를 낳고 살면서 장사를 했고 해방이 된 뒤 조선 땅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큰 딸은 콜레라에 걸려 죽었고 기분 나쁘면 '더러운 년'이라고 아들 앞에서 "가슴에 칼을 내리꽂는 소리"를 했던 남편은 사고로 숨졌다.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 때 해수욕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후 김학순은 그녀를 성폭행했던 한국군 장교와 함께 전라남도 해남으로 가서 '첩' 생활을 했다. 20여 년 만에 그 집에서 도망쳐 서울에서 가정부 생활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198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고 김학순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첫 증언에 대한 1991년 8월 15일자 《경향신문》 보도기사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

한편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평생을 걸었던 윤정옥 교수의 노력이 서서히 호응을 얻은 것도 1980년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현재에도 계속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로 받아들인 여성단체들은 식민지 시기 공권력이 여성들에게 범한 성범죄인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현재의 구조적인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리라 생각했다. 일본 정부에게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한국 정부에게는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고, 한국 정부는 소극적이었다. 문제해결 노력이 벽에 부딪힌 상황 속에서 여성단체들은 피해자를 찾았다. 그러나 성적 피해자에게 공공연하게 낙인을 찍는 현실에서 피해자들은 피해자임을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 때 김학순이 나타났다. 일본의 거짓말을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오직 나 홀몸이니 거칠 것도 없고 그 모진 삶 속에서 하느님이 오늘까지 살려둔 것은 이를 위해 살려둔 것" 같다고 했다. 고대하던 생존자가 나타났지만 활동가들은 공개 증언을 망설였다. 공개 증언을 한 뒤 김학순에게 닥칠 일본 정부의 공격과 한국사회의 냉담을 가늠할 수 없어서였다. 오히려 김학순이 호통을 치며 공개를 독려했다.

김학순이 최초로 증언을 한 뒤, 가장 큰 충격을 받고 변한 사람은 같은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이었다. 다른 피해자들은 김학순의 증언을 지켜보며 "나와 똑같은 일을 당한 사람이 있다"는 충격과 위로를 함께 얻었다. 그리고 '그 일'을 얘기할 용기를 얻었다. 피해신고를 위해 개설한 전화번호(02-730-4400)가 바쁘게 울렸다.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서 피해를 이야기하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1991년 말 관계 문서가 발굴되자 일본 정부는 실태조사에 착수했고 문헌자료와 피해자 증언을 바탕으로 1993년 8월 '고노담화'를 발표했다. 피해생존자들은 "부끄러운 것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들이다"라며 적극적으로 증언을 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나갔다.

최초 증언 후 김학순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누구 못지않게 앞장서면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역사를 말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여성 활동가이자 평화운동가가 되었다. 1997년 12월 16일, 김학순은 73년에 걸친 이승의 삶을 마감했지만, 그녀의 바람은 현재도 여전히 남아 있다.

"절대로 이건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