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놀라운 경험을 했다. 10여년에 걸쳐 4번쯤 가 본 교토(京都)에 또 갔었는데 어린 시절 처음 갔을 때는 절이나 건물 하나하나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교토 여행은 '절이 절이고, 탑이 탑이지 뭐'하는 태도로 일관해왔다. 그런데 다섯 번째 방문부터는 달랐다. 하나 둘씩 머릿속에 지식이 쌓인 탓인지 도시의 거리와 구조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 나 혼자 찾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해 1년 동안 교토를 8번 찾아갔다.
지난 9월 하순에 있었던 베트남행은 4번째 방문이었고, 베트남 사회과학원과의 포럼은 5번째였다. 2010년 두 기관이 해마다 교대로 회의를 개최하기로 약속을 하고 난 이후 몇 몇 베트남 학자들은 베트남과 서울에서 반복해 만나게 되면서 이제는 얼굴과 이름이 익숙해지기에 이르렀다. 그래서인지 이번 회의를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하노이에서에서 일어날 일을 상상할 수 있었다. 물론 거리 모습과 자연 경관, 도심의 소음들도 생각났으나 무엇보다 베트남 학자들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 이전 방문 때 느끼지 못한 설렘을 맛봤다. 그 감정은 자연스럽게 회의 주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재단과 베트남이 함께했던 회의에서는 솔직히 학문적으로 그다지 깊이 있는 토론을 하지 못했다. 우리와 베트남 참가자 모두 상대 나라 역사나 정치에 관한 배경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회의여서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끝나버렸다. '절이 절이지 뭐'하는 무감동 상태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준비 단계부터 하나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그램을 만들 때부터 발표자는 상대방에게 자국의 상황을 이해시키려 노력하고, 듣는 이는 부족한 부분을 질문으로 보충하려고 애쓰는 회의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발표자와 토론자 사이의 친근감도 더 생길 것 같았다.
하노이를 떠올리며 준비한 회의에서 '진심'을 나누다
이번 회의는 3개 세션으로 구성하였다. 첫째는 양국 모두 초미의 관심사인 영토문제, 둘째는 양국의 역사 비교와 오늘의 정치, 셋째는 한-베 공동역사교과서 제작의 문제점이다. 영토문제는 세 차례 정도 해 온 주제여서 익숙했지만 무엇보다 솔직한 질문과 상황설명이 오갔다. '민감한 문제라 피해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주고받았다. 이전에는 엉뚱하게 답하고 넘어간 부분이다. 역사문제에서 양국이 공동으로 겪은 조공체제를 한국과 베트남은 어떻게 다르게 인식하고, 오늘날 국제관계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도 이야기했다. 둘째날 진행된 셋째 주제는 한국 내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어떻게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를 가르칠지, 그리고 그 아이들이 어떻게 어머니 나라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줄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의 생각이 달라져서인지 참가자들의 반응도 이전과는 달랐다. 낯익은 베트남 학자들이 찾아와 서로 농담도 하고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다른 학자 안부도 물었다. 우리 참가자들은 베트남과 더 많은 교류와 학습이 있어야겠다고 눈을 반짝거리며 흥미를 보였다. 모두 베트남이 초행길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문제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