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중국 언론들은 중국의 학계와 민간단체가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약탈해 간 '홍려정비'를 반환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는 소식을 전했다.
여기서 먼저 전제하고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비석 명칭이다. 간혹 '발해석각'으로 알려져 발해가 세운 비석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이 비석은 발해와는 무관한 당나라 사신 최흔(崔忻)이 발해 지역을 다녀가면서 요동반도 남단 뤼순(旅順)에 남긴 글자비다. '홍려정비', '당비' 등으로 불리다가 러·일 전쟁 후 석비 외곽에 설치한 정자까지 일본 왕궁으로 옮겨지면서 '당비정(唐碑亭)'으로 불렀다. '발해석각'으로 알려진 계기는 여기에 새겨진 29구절의 한자 때문이다.
"勅持節宣勞靺羯使 鴻臚卿崔忻井兩口永爲 記驗開元二年五月十八日(말갈을 회유할 임무를 지닌 홍려경 '최흔'이 여기 두개 우물을 파서 영원히 증거로 남긴다. 개원 2년 5월 18일)"
말갈을 회유하는 임무를 지닌 당나라 사신 최흔은 714년(개원 2년) 당으로 돌아가면서 이 글귀를 새겼다고 전한다.
발해의 건국 국호는 '말갈'이 아닌 '진'
석각 내용 중 가장 논란인 부분은 '선로말갈사(宣勞靺羯使)'의 '말갈'이다. 이것을 빌미로 중국학계는 '말갈'이 고왕 대조영이 세운 '발해'의 국호로 보고, 713년 최흔이 출사한 후 발해가 '말갈'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오로지 '발해'로 부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당나라가 발해를 책봉하고 복속시켜 당에 편입시켰다는 증거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762년 건립되었다는 일본의 다하성비(多賀城碑, 762년 건립)에 나오는 '말갈'과 연결하여 당시 이 말갈이 고왕 대조영의 초기 국호를 말한다고 확대 해석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건국 당시 국호가 '말갈'이라는 주장은 역사기록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 일본의 말갈은 '하이(蝦夷)' 즉 아이누를 나타내며, '다하성비' 자체에 위조설까지 있으므로 중국학계에서 이렇게 해석한 것은 실로 '방증의 과욕'을 자초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 연구 성과와 고증은 '홍려정비' 이상의 접근이 필요하다. 오히려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대표적인 정사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에는 발해 건국 국호를 진(振 또는 震)이라고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중심이 되고, 말갈족 등 주변민족과 함께 건립한 고구려 계승국이라는 점을 중원의 기록이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또 오대(五代) 시기에 편찬한 《구당서》와 송대(宋代)에 편찬한 《신당서》에는 각각 〈발해말갈전〉, 〈발해전〉이 있다. 이는 발해 국가가 기틀을 잡으면서 발해가 중심인 국가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최흔의 '칙지(勅持)선로말갈사' 직함은 발해 초기 말갈이 발해에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당나라 역시 고구려 이래로 시달렸던 말갈에 대한 염려를 한시름 떨쳐내는 계기적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비석을 둘러싼 중·일 간 문화재 조정 못지않게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중·일 간의 발해-말갈 인식이다. 바야흐로 한국발해사학계의 과제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당당한 독립국임을 어떻게 실증적으로 뒷받침하는가에 있다.